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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김민서의 나와 같다면
등록 2011-10-26 17:40 수정 2020-05-03 04:26
사진 mnet 제공.

사진 mnet 제공.

여자는 공감의 동물이다. 이 명제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화에서는 물론 드라마나 영화, 책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의 개인적 연결고리를 찾는 그녀들과 공감하며 재재거리는 것이 칼럼을 시작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공감과 감정이입을 원동력으로 삼는 프로그램은 단연 서바이벌 오디션이다. ‘악마의 편집’의 목적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어놓고 대중으로 하여금 내면의 욕망과 개인적 가치관을 버무려 특정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최근 가장 마음이 동했던 캐릭터는 의 유일한 푸른 눈 크리스다. 그는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인이다. 통역사를 대동하지 않고서는 심사평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생방송 무대에서도 MC의 탈락 발표에 가만히 통역만 기다리다가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합격과 탈락의 뜻도 구분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부당하게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파란 조명 아래서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 있는 그 모습에서, 난 이방인의 먹먹한 외로움을 보았다.

누구나 삶의 어떤 꼭지에선 이방인이 된다. 만년 학생일 줄 알았던 내가 처음으로 소속감 없는 백수가 되었을 때 나는 낯선 세계와 조우한 이방인이었다. 첫 책을 낸 뒤에도 내가 작가인지 작가를 빙자한 백수인지, 소속은 어디며 새 동료들은 누구인지 가늠할 길이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외딴 기분에 어깨가 처질 때마다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었던 건 친구들의 힘이 컸다. 평생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고 살다가 평생 누군가의 밥을 챙겨줘야 하는 어린 아내가 된 내 친구는, 기혼의 세계를 외계에 비유하며 유부녀로 불릴 때마다 외계인이 된 기분이라고 고백했다. 4년 내내 이공계열에 몸담았던 친구는 어느 날 뮤지컬 배우가 꿈이라며 과외 뛰는 돈으로 보컬과 재즈댄스를 배우고 있다고 수줍게 털어놓았다. 크든 작든 새로운 세계란 반복적이고 필연적으로 헤쳐나가야 할 인생의 과제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주해 이방인으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나만 먹먹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모두가 아늑했던 과거의 세계와 작별하고 불온하고도 매력적인 낯선 세계에서 기꺼이 이방인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다독여주었다. 언어라는 핸디캡을 음악으로 극복하려는 파란 눈의 미국인 청년처럼 우리 모두 일정의 핸디캡과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노력과 열정이란 날개만 있으면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판타지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믿는다.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김광진의 을 부르던 크리스의 진심이 와닿았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낯선 세계의 조류에 휩쓸렸던 당신과의 유대감 때문이 아닐까.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저자* 새 연재 ‘김민서의 나와 같다면’은 싱글의 눈으로 본 세상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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