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포스터. 더무비데이터베이스 갈무리
게임 속에도 하나의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른다. 많은 인원이 한 공간에 모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에서는 더욱 자연스럽게 사회가 형성된다. 그 작은 사회에서 게이머들은 현실 사회와 닮은 일상을 살아간다.
유명한 사건들이 있다. 2003년 발매된 리니지2에서 발생한 ‘바츠 해방전쟁’이 대표적이다. 게임 내 바츠라는 서버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폭거를 일삼은 길드에 맞서 무수한 유저가 연합해 혁명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 양상이 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과 꼭 닮았는데, 혁명 직후 벌어진 이권 다툼과 반동조차 실제 혁명을 닮아 있어 많은 연구가 이뤄진 바 있다.
광고
2004년 발매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약칭 ‘와우’)에서 발생한 ‘오염된 피’ 사건도 유명하다. 버그(프로그램의 결함에 의해 컴퓨터 오류나 오작동이 일어나는 현상)로 인해 체력이 지속적으로 깎여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게임 내 세계 곳곳에 확산된 사건이다. 이때 유저들이 보인 행동이 코로나19 당시 우리 모습과 꼭 비슷해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됐다.
유명한 사건들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혁명과 전염병보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일상에 가깝다. 서로 대화하고, 분열하고, 관계 맺고, 사랑하고, 혐오하고, 돕고, 싸우고, 울고, 웃는다. 12·3 내란 와중에도 우리는 그런 일상을 살아내지 않았던가. 경쟁과 전투가 주를 이루는 게임에도 사회는 있고, 유저들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게임 속에서 재현한다.
음, 어쩌면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남들과 같은 일상을 누리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게임이야말로 남들과 같은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대안적 사회’인 셈이니까.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의 주인공 마츠 스테인.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광고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게임이 어떻게 대안적 사회가 될 수 있는지를 이 세계에 잠시 함께 살았던 한 장애인의 삶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츠 스테인. 1989년 태어나 201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뒤셴 증후군’이라는 희귀 근육 질환을 안고 태어났다. 어머니에게서 아들에게만 유전되는 이 병은 남자아이 3500명 중 한 명꼴로 나타나는 매우 희귀한 질환으로, 몸의 근육이 서서히 약해지다가 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져 대개 20살 무렵에 사망하게 된다.
또래들이 학교에 들어갈 나이부터 그는 이미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지 않았던 그에겐 게임이 최고의 친구였다. 이런저런 게임을 하던 그가 어느 날 ‘와우’를 만난다. 와우는 그에게 “탈출구”였고, 와우 속 세계를 보여주는 모니터는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8년 동안 거의 2만 시간을 쓸 정도로 와우에 매달렸다. 몸이 완전히 굳어버리자 다섯 손가락으로 와우를 플레이할 수 있는 특수장비까지 제작할 정도였다.

마츠 스테인이 게임을 위해 제작한 특수 장비로 게임을 하는 모습. 넷플릭스 트레일러 갈무리
그런 그를 부모는 안타까워했다. “(게임 속) 사람들이 마츠를 알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만난 적도, 대화해본 적도 없잖아요.” 게임을 모르는 부모에게 게임은 “너무나 제한된 세계”로 보였고, 삶의 필수적 부분인 “우정이나 사랑, 남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경험”을 줄 수 없는 세계였다.
광고
마츠는 그의 삶을 꼬박꼬박 기록한(왼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가상키보드에서 한 글자씩 입력해야 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츠가 세상을 떠난 직후 부모는 블로그에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글을 올렸다. 우정도 사랑도 남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경험도 해본 적 없는 아들을 안타까워했던 부모는 그때야 자신들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츠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지, 기억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메일들을 읽고 나서야.
마츠는 블로그에 그의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해두었고, 그가 와우에서 속해 있던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2천 쪽에 달하는 로그(게임상 대화나 행동을 기록한 것)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이 기록을 그러모아 와우와 같은 그래픽으로 재현한 이야기다. 마츠가 게임 속 사회에서 살아낸 인생은 평범했고 그래서 비범했다.
그의 와우 닉네임은 이벨린 레드무어. 사설탐정이었다. 아제로스 행성의 스톰윈드라는 지역을 거점 삼아 활동하는 ‘인싸’였다. 튼튼한 두 다리로 게임 속 숲을 뛰어다니며 만난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말 걸고, 때때로 그들의 고민과 하소연을 귀담아들어주며, 여관에 들러 좋은 음식과 술을 먹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이벨린에게 스톰윈드는 “자신을 옭아맨 사슬에서 벗어나는 곳”이었다. 모두 저마다의 개성으로 제한 없이 꾸밀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는 외모가 중요하지 않은” 세계에서 이벨린은 외양이 아니라 말과 행동, 성격으로만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마츠 스테인의 게임 속 캐릭터 이벨린이 또 다른 캐릭터에게 꽃을 주는 모습. 넷플릭스 트레일러 갈무리

마츠 스테인의 게임 속 캐릭터 이벨린이 여관에서 술자리를 즐기는 모습. 넷플릭스 트레일러 갈무리
이벨린이라는 ‘확장된 몸’으로 마츠는 비범한 인생을 살았다. 이 세계에서 이벨린은 다른 여성 유저와 ‘썸’을 타다 가상의 키스를 나눠보기도 하고, 또 다른 유저와 바람을 피워보기도 하고, 한 어머니에게 자폐아 아들과 게임으로 교류해보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현실의 문제로 낙담한 유저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내기도 한다. 당연히 좌절도 있었다. 길드원들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할 수 없어 괴로워하고, 음성 채팅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우울해했다. 그러다 길드원들에게 마음에 없는 모욕들을 쏟아낸 뒤에야 자신의 블로그와 함께 장애 사실을 밝히게 됐는데, 길드원들은 간단하게 답했다. “넌 여전히 너야. 우리한텐 똑같아.”
여기까지가 마츠, 이벨린의 이야기다. 다른 나라에 사는 길드원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했다. “신체적 제한이 없는 곳에서 마츠를 만났습니다. 매일 어떤 고민을 하든 어떤 당면한 문제든 아무 상관 없는 곳,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곳에서. 마츠, 변화를 일으켜줘서 고마워.” 마츠의 묘비엔 ‘이벨린’이라는 닉네임이 함께 새겨졌다. 게임 속에서야 비로소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누릴 수 있었던 마츠에게 이벨린으로서의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2024년 9월 한 게임 커뮤니티에 ‘56살 로아 하는 아줌마’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MMORPG인 로스트아크(약칭 ‘로아’) 유저라고 밝힌 필자의 사연은 먹먹했다. 30년을 함께 산 남편과 2020년 2월 사별한 뒤로 우울증을 앓고 자살 사고도 많이 했다는 그는 어느 날 남편이 즐겨 하던 로아에 남편 아이디로 접속하게 된다. 로아 속 세계는 그에게 큰 위로가 돼줬다고 한다. 이런저런 퀘스트(주인공이 하달받는 일종의 임무)를 깨고, 모험하면서 만난 유저들과 소소하게 이야기 나누며 관계를 쌓았다. 현실 속 사회와 멀어진 그에게 로아 속 사회는 삶의 버팀목과 같았다.
그렇게 5년 가까운 시간을 즐겼는데, 갑자기 계정보호 조처가 떴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로 게임을 하는 것은 약관상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정의 주인은 고인이 됐기에 본인 인증을 할 방법도 없었다. 게임사인 스마일게이트에 사실대로 사정을 말했다. 증명 가능한 서류를 모두 제출할 수 있다고 호소했지만 유의미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그는 “로아 안에서의 추억 하나하나들이 다 생각나면서 너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글이 크게 이슈가 된 뒤에야 스마일게이트에서는 고인의 직계가족에 대한 명의 이전 프로세스를 마련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엔씨소프트나 넥슨의 경우 이미 계정 상속 절차를 마련하고 있는데, 자산소유권의 맥락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공간으로서 게임, 기억의 집합으로서 게임이라는 맥락에서 촉발된 이번 논의를 계기로 오늘날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좀더 풍성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게임 정보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 ‘중년게이머 김실장’의 구독자 애칭은 ‘매몰단’이다. 사람들이 온라인게임을 쉽게 접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영상에서 시간과 금전과 관계라는 세 가지 매몰비용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게 크게 화제가 돼서 붙은 애칭이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의 주인공 마츠 스테인의 어릴 때 모습. 부산국제영화제 누리집 갈무리
시간과 비용이야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이야기지만, 관계의 매몰은 게임 속 사회를 모르는 사람에겐 그다지 와닿는 개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온라인게임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와우가 2004년 11월23일 출시됐으니, 지난달로 20주년을 맞은 셈이다. 20년만큼의 사회가 와우 안에 축적돼 있다.
마츠에게 와우가 ‘자신을 옭아맨 사슬’에서 벗어난 관계를 제공했듯, 남편과 사별한 여성에게 로아가 치유와 회복의 관계를 제공했듯, 우리가 사회적관계망으로서의 게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타인과 게임과 이 세상에 대한 더 크고 깊은 이해에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5년치 보은 몰아치려니…몰락한 내란 정권의 ‘알박기’ 금도 넘었다
윤석열 대답 떠먹여준 지귀연…직업 대독하자 윤 ‘고개만 끄덕’
“마지막 소명” 언급한 한덕수…전략적 모호성 유지하며 출마 저울질
‘마지막 소명’을 위해 [그림판]
[단독] 윤석열, 나랏돈으로 캣타워 500만원에 ‘히노키 욕조’ 2천만원
공수처 인사위원이 한덕수 고소…“검사 7명 임명 미뤄 직무유기”
한덕수 “나와 통화 뒤 관세 유예” 자화자찬…‘알래스카 LNG’ 급발진
LG ‘2조 상속분쟁’ 판결 촉각…‘장자승계 합의’ 무효 입증이 관건
국민의힘 해산은 왜 논의하지 않는가 [왜냐면]
스포츠윤리센터, 유승민 징계 요청…“탁구협회 후원금 유치 근거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