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 따라 식물의 이야기 들어봐

한반도 바닷가에 자리잡은 식물생태계 집대성한 김종원 식물사회학자

따뜻한 남쪽 나라 출신인 갯무는 빙하기 때 해류를 타고 당시 해안선을 따라 제주도에 정착했다. 4~5월 모래밭에서 연보랏빛 예쁜 꽃을 피운다. 제주도와 한반도 동남쪽 해안에 산다. 김종원 제공

 

2025년 2월10일 김종원 전 계명대 교수가 대구 달성군 하빈면 자택 서재 책상에 앉아 있다. 책장에는 전세계를 다니며 수집, 연구한 식물과 그 서식처 관련 각종 자료들이 분류돼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는 지금 딛고 선 땅으로 오게 된 긴 여정과 앞으로 갈 길을 말해준다. 그 여정을 동물과 사람이 뒤따랐다. 반드시 식물이 일군 삶의 터전 위에서만 동물이 살고, 인간이 문화를 꽃피운다. 그래서 식물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우리가 누군지 근원을 추적해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풀과 나무의 말을 전문적으로 듣고 통·번역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식물사회학자다. 우리나라엔 드물다.

2025년 2월10일 대구에서 식물사회학자 김종원(68) 전 계명대 교수를 만났다. 김 전 교수는 2013년 서식처 기준에 따라 우리나라 식물사회를 추적한 ‘한국식물생태보감’(생태보감·자연과생태 펴냄) 제1권 ‘주변에서 늘 만나는 식물 편’을 펴냈고, 2016년에는 제2권 ‘풀밭에 사는 식물 편’, 최근에는 제3권 ‘바닷가에 사는 식물 편’을 펴냈다. 3권 합쳐 2703쪽이나 되는 거대한 편찬 작업이었다.

2025년 2월10일 김종원 전 계명대 교수가 대구시 한 카페에서 식물과 그 서식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동물과 인간이 뒤따른 식물의 여정

“식물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려면 당시 해안선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에 해수면이 상승합니다. (제주도와 일본 규슈 사이의) 북태평양 내만이 점점 확대됩니다. 가덕도, 거제도, 태종대가 드러나고 남해안 리아스식 해안선으로 드러납니다. 서해 쪽으로 바다가 들어가서 팽목항을 지나 쭉 올라가는 거죠. 지금 같은 해안선이 만들어진 건 길게 잡아도 1만 년 전입니다.” 김 전 교수가 그림 그리듯 해안선에 대해 설명했다.

한반도 해안은 개성이 뚜렷한 공간이다. 동해안은 해안절벽에 무리 지어 사는 향나무들의 무대다. 남해안은 돌출 산지로, 여기엔 넓은잎 낙엽수인 산서어나무(소사나무) 숲이 띠처럼 이어진다. 서해안에는 드넓은 갯벌이 이어지면서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칠면초가 펼쳐진다.

빙하기가 극성이었던 1만5천 년 전만 해도 해수면은 지금보다 130㎝가량 낮았다. 동해는 육지 속에 갇힌 내해였다. 서해와 남해는 완전한 육지였고, 서해 한가운데로 황허강이 흘렀다. 제주 성산포 일대가 옛 황허강 어귀였다. 동남아에서 하이난섬과 대만을 거쳐 제주도 동쪽으로 긴 해안선이 이어졌다. 이 해안선을 따라 갯무·문수란(문주란)·잠녀콩(해녀콩)·황근(黃槿) 같은 남쪽 식물이 우리 땅에 상륙했다. 모두 씨앗이 구로시오 난류(대만 동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따라 이동하다 정착한 남방계 식물이다. 제주 동부나 한반도 동남쪽 해안의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지가 확인된다.

4~5월 모래밭에서 연보랏빛 예쁜 꽃을 피우는 갯무는 열매 껍질이 스펀지 같아서 해류를 타고 이동하다 바닷가 모래 자갈에 파묻힌 뒤 뿌리를 내린다. 경북 포항 구룡포까지 진출해 있다. 문수란은 일본 식물학자의 착오로 지금껏 문주란으로 불리고 있다. 문수(文殊)와 문주(文珠)는 일본 발음으로는 똑같이 ‘몬주’다. 잠녀콩은 대만이나 류큐제도 등에서 자라는 아열대 식물이다. 토끼섬(제주 구좌읍 하동리) 군락지가 잠녀콩의 북방한계다. 무궁화의 친척으로 노란 무궁화꽃을 피우는 황근은 우리나라 해안식물 가운데 유일하게 어른 키 이상 자라는 반(半)맹그로브 식물이다.

“우리가 구석기·신석기 선사인을 말할 때 단군 설화 중심의 북방 줄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남방 쪽 다른 줄기를 꼭 함께 봐야 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선 소금이 필수예요. 바다를 끼고 이동하는 집단이 경쟁력이 있을 수밖에 없죠. 뭘 먹었을까요. 바닷가 갯무나 갯고들빼기 같은 구로시오 해류를 따라 먼저 자리잡은 식물을 먹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먹는 지중해 원산 개량무만큼 크진 않지만 갯무는 조금 작아도 같은 맛이에요. 지금도 총각김치를 만들어 먹고 무청으로 뜯어 먹어도 됩니다.”

 

막개발·각종 복원 사업으로 위태로운 군락지

반면 향나무는 북방에서 내려와 우리나라 동해안, 그중에서도 2천만 년 된 해안절벽에서 살아왔고, 섬향나무, 눈향나무 등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다. 경남 합천 해인사 비로자나불 쌍불도 1200여 년 전 신라 말기에 100~120살 된 향나무로 만들어졌다.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향나무 조각상이다. 각종 개발공사와 남벌로 군락지가 많이 훼손됐지만, 동해안은 향나무의 고향이다. 납작 엎드려 자라는 섬향나무는 절벽 중에서도 직벽에 가까운 급경사 바위를 부여잡고 살아간다. 대한해협 주변의 극히 일부 해안절벽에서만 섬향나무가 살아가고 있다. 포항 하선대의 섬향나무 군락지는 국내 최대 규모다. 김 전 교수가 이번 집필 과정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동해안 은빛 모래언덕(사구)을 수놓았던 꽃나무, ‘바다 찔레’ 해당화(갯때찔레) 역시 북방 식물이다. 동해안은 기후에 따라 해당화와 남방 식물인 순비기나무가 세력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강원 북부 해안 쪽으로 갈수록 순비기나무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해당화가 크게 감소한다. 해당화는 그 한자어 이름(海棠花) 때문에 중국 식물로도 오해받지만 중국 원산 해당화류는 다른 식물이다. 이런 오해가 오늘날 문제만은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도 중국의 다양한 해당화류를 나열한 뒤 ‘서울 사람 꽃 기르기, 복사꽃 오얏꽃이 다인데 (…) 매괴(해당화의 옛이름)를 잘못 알고 해당화라고 부르다니’(1819년 ‘아언각비’)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해당화의 최남단 군락지인 포항 화진리 해당화 자생군락지가 막개발로 자취를 감췄다. 해안사구를 차도로 내줘서 해당화가 사라진 건데, 최근엔 다시 그 서식처를 ‘생태복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해당화가 사는 서식처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없이 이뤄진 복원은 되레 자연을 더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나라 여러 해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각종 복원 사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동해안에는 곰솔(해송) 심기가 유행이다. ‘탄소중립’ ‘해안 침식 방지’ 등등 내거는 구호는 그럴듯한데, 오히려 해안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어놓은 곰솔이 줄줄이 죽어 나간다고 한다.

“바위라고 하면 절벽 꼭대기, 어깨 부분(가장자리), 바위벽, 바위틈, 움푹 들어간 바위 주머니(암낭) 등등에 따라 식생이 전혀 다릅니다. 해안사구도 바다 쪽 초기 사구부터 후사구까지 미세한 지형에 따라 식생이 다 다릅니다. 해안사구처럼 예민하고 상처 입기 쉬운 취약 생태계는 자연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선의 복원 전략인데, 그걸 알 수 있는 해안식생지(도) 등 우리나라에 아직 식생지(도)가 없습니다. 서식처 구조도 모르고 ‘복원’한다는 거죠.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매니 꿰매지겠습니까? 거름을 왕창 붙인 채로 곰솔을 갖다 심습니다. 이건 모래사장을 오염시키는 겁니다. 복원이 아니라 쓰레기매립장을 만드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 해안선 사정은 염치 없는 인간의 간섭 때문에 형편없습니다. 현재 해안선(막개발)에 대한 응급조치로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 해안식생지를 하루빨리 만들어야 해요.”

포항 하선대도 해안 탐방로 공사로 섬향나무 군락지가 위태롭다. 현장을 다녀온 김종원 전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향나무, 섬향나무 군락지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이곳이 인간이 보기에 쓸모없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안 절벽이나 강가 절벽, 그중에서도 특히 북쪽을 바라보는 을씨년스럽고 어두컴컴한 곳은 사람이 거의 안 옵니다. 이런 ‘숨은 서식처’(Cryptic Habitat)는 야생 생물 다양성과 유전자 다양성의 은행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요즘 생태탐방을 한다고 여기에 유행처럼 탐방로 데크를 냅니다. 내가 사는 안방 한가운데에 길을 하나 내는 것과 같습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프라이버시가 노출됩니다. 식물도 똑같아요. 길 중심으로 햇빛이 쏟아집니다. 어두운 데 사는 식물은 쫓겨납니다. 식물 종이 바뀌니, 곤충 다양성이 바뀌고, 새들의 다양성이 바뀝니다. 길 하나 낸다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식의 개발을 생태학 학술용어로 에코 테러라고 합니다.”

식생이 영향을 받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성이 강한 고사리를 식용하는 나물 문화가 생긴 것도 자연사(물, 공기, 토양, 암석, 식물의 역사)와 문화사가 빚어낸 결과다. 김 전 교수는 “쉽게 설명해볼게요. 아이가 도시의 아파트에서 성장하면 어른이 돼도 아파트에 관한 시를 씁니다. 숲에서 자란 아이는 숲에 대한 시를 쓸 겁니다. 자연은 우리 삶의 무대이고, 식물은 가장 중요한 소품입니다. 식물은 모든 생물의 바탕입니다. 우리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접근

‘도감 속에 생명성이 없다. 생명 사랑도 없다. 활자 속 식물들은 과학적 대상화의 소품일 뿐이고, 일제 유산을 지금껏 베끼고 베꼈다.’(생태보감 제1권 저자서문 중)

학술적인 분류체계에 따른 식물 책인 ‘도감’과 같은 방식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서식처 개념으로 식물사회에 접근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생태보감은 앞으로 제11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모두 3500여 종의 식물을 삶의 터전별로 나누었다. 앞으로 ‘바위에 의지해 사는 식물’(제4권), ‘물터에 사는 식물’(제5권), ‘벌채지, 붕괴지 등에 사는 선구식생’(제6권), ‘떨기나무 숲에 사는 식물’(제7권), ‘늘푸른 숲에 사는 식물’(제8권), ‘아고산, 고산지대에 사는 식물’(제9권)로 이어지면서 사람에게 가까운 식물부터 먼 식물까지를 다룬다. 이어 제10권에서 은행나무, 무궁화 같은 자생식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물’을, 제11권에서 ‘귀화한 식물들’을 다룰 예정이다. 김 전 교수는 생태보감 집필을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제가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있을까도 싶습니다. 하늘이 뜻이 있다면 (저를) 살려둘 것이고 중간에 그만둔다면 후학들이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지난 주말 경남 거창 우두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현장을 찾을 때마다 식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가득 차요. 그걸 정리하는 데 2~3일이 걸립니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어린 조릿대들이 새파랗게 올라온 걸 봤어요. 조릿대는 40~50년이 되면 일시에 죽어버려요. 그러면 자식이 생겨나기 어렵잖아요. 종자를 만들어내지만, 벼과 식물은 2~3일 내 발아하지 않으면 쉽게 썩어요. 대체 어디서 어떻게 발아하고 퍼져나가는지 늘 의문이었어요. 그런데 한겨울 등산로 가장자리 낙엽들 사이에 새파란 새싹이 있더라고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새파란 조릿대가 ‘내가 이렇게 살아갑니다’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대나무와 달리 조릿대는 자생식물이거든요. 그런 제주도 한라산에 사는 섬조릿대를 골치 아프다 하는데, 그 조릿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제7권에서 다룰 겁니다.”

 

2025년 2월10일 김종원 전 계명대 교수가 대구 달성군 하빈면 자택 마당에서 자라는 소나무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송연(松然) 즉 '소나무답게 사는 소나무'라고 이름지었다. 김 전 교수는 "식물들도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e-mail]

식물의 이야기를 잘 듣는 비법

김 전 교수에게 식물의 이야기를 잘 듣는 방법을 물었다. “인간 사회로 말하면 역지사지라는 말에 견줄 수가 있지요. 철두철미하게 식물 입장에서 삶의 스토리에 접근하지 않고 과학의 잣대만으로는 그 답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과학적 기법이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식물과 식물사회에 대한 시선을 어떻게 가지는지가 관건이지 첨단과학 기법이 관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구=김양진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