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화방송 예능 프로그램 에 서울예술대학 89학번 동기인 네 명의 남자가 방문했다. 장진 감독, 장항준 감독, 배우 정웅인, 배우 장현성이 출연해 아옹다옹하며 재기발랄한 입담을 빛냈다. 나 또한 연극영화과 졸업생이기 때문에 무대와 함께했던 그들의 학창 시절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 사람은 가난과 재능에 대한 두려움을 열정과 용기로 이겨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그들은 여전히 스무 살 때부터 꿈꾸던 무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배우로, 감독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그들을 보며 문득 내 대학 동기들이 떠올랐다. 대선배들의 호령에 꼼짝 못하던 스무 살 신입생 시절이 너무도 아득히 느껴진다.
첫 신입생 환영식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색하게 어른을 흉내낸 듯 아직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옷차림, 지금 내가 분위기를 잘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몰라 눈치만 보던 얼굴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그러나 당시엔 너무도 무서웠던 전설 속 대선배들의 연설과 쓰디쓰기만 했던 술잔.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과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모호한 기대가 뒤엉켜 다들 들떠 있었다. 우리 진짜 잘해내자, 평생 함께 가자, 뭔가 다른 걸 보여주자. 새파란 열정에 취한 말들이 싸구려 호프집을, 냄새 나는 연습실을, 좁아터진 자취방을 오갔다. 한 몸처럼 뭉쳐 다니던 신입생 시절이 끝나자 한두 명씩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고 전과를 했다. 짧은 1년이 지나고서야 그 시절이 동기들과 다 함께 할 수 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많은 동기들이 여전히 꿈꾸던 무대에서 일한다. 그러나 사회인이 된 우리의 모습은 분명, 열정과 감격에 취했던 그 시절과는 참 많이 다르다. 흔히 ‘어른이 된다’는 표현을 ‘영혼에 기름이 낀다’고들 한다. 누군가는 새파랗게 젊다고 부를 그 나이인데도 우리는 슬슬 미끄덩거리는 기름기를 느끼며 순수한 우울증에 빠지곤 한다. 만만치 않은 세상은 흔들림 없는 벽과 같고 나는 마구잡이로 던져지는 달걀 같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과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나이나 직업적 성취, 결혼이 아니라 용기의 유무 같다. 20대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고 남들이 말리는 일을 벌이는 것은 두렵다. 젊음은 나이가 아닌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빨리 늙어갈 수밖에 없다. 아직은 무작위로 깨지는 달걀 그 자체이기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벽을 향해 용감하게 달걀을 던질 수 있는 청춘이고 싶다.
언젠가 마흔 즈음에 동기들과 다시 모였을 때엔 시도하지 않았기에 안전했다는 말보단 실컷 부딪히고 깨졌더니 속이 시원하더라는 말을 더 하고, 듣고 싶다. 그것이 청춘을 가장 건강하게 추억하는 길이 아닐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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