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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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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팀’이 필요해

사회극이 판타지가 되는 이유
시스템 부재한 현실 ‘대리만족’
등록 2025-02-07 22:28 수정 2025-02-13 18:43
탐사보도팀 트리거를 이끄는 오소룡 팀장은 뛰어난 직관력과 강한 정의감으로 공권력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사이비 종교 집단 ‘믿음동산’에 잠입한 오소룡 팀장. 디즈니플러스 제공

탐사보도팀 트리거를 이끄는 오소룡 팀장은 뛰어난 직관력과 강한 정의감으로 공권력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사이비 종교 집단 ‘믿음동산’에 잠입한 오소룡 팀장. 디즈니플러스 제공


진실은 어느 때 무력해질까? 그릇된 신념, 자본과 권력으로 변질된 주장을 섞어 진실이라 우기면 ‘진실’과 ‘진실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누구의 진실이 진실인가?” 당황해하다가 결국 진실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데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은 뭘까? 각자의 정의가 자신의 눈과 귀를 막고 서로 힘겨루기를 할 때 사람들은 정의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2024년 12월 이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가 이렇다. 진실이라 주장하는 말들이 ‘정론' 역할을 하며 진실을 오염시키고, 폭력이 정의로 둔갑해 진실을 겁박한다. 그래서 어느새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는 데 주저함이 생기곤 한다. 이런 현상은 갑자기 생긴 것일까? 그간 켜켜이 쌓인 언론과 공권력을 향한 불신이 폭발한 상황일까?

진실이라 믿는 그것은 진실일까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 등장한 드라마 ‘트리거’(디즈니플러스)는 집요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케이엔에스(KNS) 시사교양국 탐사보도팀 ‘트리거'를 이끄는 팀장 오소룡(김혜수)은 뛰어난 직관력과 강한 정의감으로 공권력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파헤친다. 여기에 인간을 혐오하는 사회성 제로 피디 한도(정성일)가 ‘낙하’하여 합류하고 열정 가득한 막내 피디 강기호(주종혁), 베테랑 메인 작가 홍나희(장혜진)와 팀을 이루게 된다. 트리거팀은 20년째 해결되지 않은 연예인 실종 사건을 중심으로 지적장애 청년 사망 사건, 고양이 연쇄 사망 사건, 친부 살해 시도 사건, 불법 영상물 유포 사건, 학성동 건물 붕괴 사건, 스토커에 의한 피해 등 다양한 사회적 사건의 내면을 파고든다.

사회성 제로 피디 한도(정성일)

사회성 제로 피디 한도(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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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팀이 사력을 다해 사건을 취재하는 첫 번째 이유는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단순 변사 처리된 지적장애 청년의 사망 사건 뒤에는 ‘믿음동산’이 있었다. ‘믿음동산’은 취약한 이들을 모아 마약을 재배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그곳에 입소했다가 사망한 청년의 사인은 알려진 바와 다르게 마약 중독이었다. 폐지 줍는 남성 노인이 범인이라고 알려진 고양이 연쇄 사망 사건의 진범은 서울대 의대 진학을 목표하는 남성 청소년으로, 그는 과거 동생을 익사시키고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친부 살해를 시도해 무거운 형벌을 받을 위기에 처한 여성 청년은 오랜 세월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해온 피해자였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남편에게 심각한 폭력을 당해왔다. 다수의 피해자가 생긴 학성동 건물 붕괴 사건은 포클레인 운전사의 실수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하청에 재하청을 주며 노동자를 혹사하고, 공사비를 후려쳐온 구조의 문제였다. 이 사건들의 진실은 트리거팀의 취재로 온전하게 드러난다.

열정 가득한 막내 피디 강기호(주종혁)

열정 가득한 막내 피디 강기호(주종혁)


이 사건들은 단순한 범죄의 나열이 아니다. 이들이 파헤친 것은 모두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들이다. 타락한 종교, 성폭력과 가정폭력, 기업의 구조적 부패 등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다. 트리거팀은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 숨겨진 가해자가 벌을 받게 한다. ‘카메라는 힘이 쎄!’라는 4화 부제처럼, 카메라의 힘을 선하게 활용한다.

누군가는 트리거팀의 지나친 개입이 불편할 수 있다. 경찰과 검찰이 할 일을 방송사 탐사보도팀이 하는 모양새이므로. 트리거팀이 사력을 다해 사건을 취재하고자 애쓰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경찰과 검찰 등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 무리한 취재 방식에 항의하는 한도에게 소룡은 이렇게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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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 그딴 거 없어. 사람이 죽었잖아”

“지적장애가 있는 어린 청년이 김 목사 부부가 운영하는 시설에 입소했어요. 1년이 안 돼서 온몸이 썩은 채 공중화장실 변기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로 발견됐고 경찰은 왜 때문인지 단순 변사로 종결. 그런데 우리가 어렵게 어렵게 입수한 자료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해요. 혈액에서 검출된 다량의 마약이 진짜 사인이라고. 그것도 타인에 의한.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려면 부검이 필요한데 김 목사 이 나쁜 놈이 죽은 아들을 도둑질해서 멋대로 화장까지 해버렸네. 보통의 사람들은 일과처럼 이 뉴스를 홱 넘겨버리거나 댓글 ‘화나요’ 정도를 누르면 끝나지만 우리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안에 들어가서 증거를 찍어야 돼. 그래야 나쁜 짓을 멈추니까. 다른 이유? 그딴 거 없어. 사람이 죽었잖아. 억울하게.”

‘믿음동산’ 사건뿐만이 아니다. 경찰은 번번이 사건 해결을 방해하고, 변호사와 검사는 자본과 권력에 휘둘려 피해자 보호가 아닌, 가해자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는 사이, 진실은 수면 아래로 더 깊이 가라앉는다. 그렇기에 소룡의 말은 문제의 본질이자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진실’이기도 하다. 시민들은 국가가, 법이, 검찰이, 경찰이 자신을 보호해주고, 공정하고 정의롭게 작동된다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이런 문제의식이 드라마에도 투영됐다. 결국 트리거팀을 움직이게 하는 ‘트리거’는 공권력의 무능과 타락인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트리거’는 트리거팀의 영웅적인 면을 통쾌하게 보여주는 드라마 같지만, 사회적 신뢰가 하락한 탈진실의 시대에 진실의 모순성과 복잡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면도 있다.

학성동 건물 붕괴 사건 때 결정적 제보를 한 대기업(GR) 회장 운전기사는 알고 보니 공금을 횡령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1억원을 횡령한 이력 때문에 징계를 당하자 앙심을 품고 제보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트리거팀이 밝힌 진실은 신뢰를 잃는다.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진실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트리거팀의 활약은 곧 또 다른 존재의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닥터 트리거’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트리거 게시판에 불륜이라는 자극적 소재를 앞세워 트리거팀을 흔들자 사장은 이를 문제 삼아 팀을 해체하려고 한다.

앞서 소개한 GR 회장 운전기사의 경우처럼 닥터 트리거 역시 트리거팀에 던져진 위기이자 진실의 모순성과 복잡성을 드러내는 장치다. 우리가 보는 뉴스의 헤드라인, 편집된 영상, 그리고 누군가의 인터뷰 속 한마디조차도 모두 의도와 맥락에 따라 변형되거나 편집된 진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정말 ‘진실’일까? 여러 개의 진실이 경쟁할 때 누구의 진실이 진실에 가까운가? 각자가 믿는 ‘그’ 진실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고 무엇을 지키는가?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수록, 진실과 진실이 경쟁하는 상황일수록 이런 자기성찰적 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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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약자가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회적 사건의 진실을 파고드는 케이엔에스(KNS) 시사교양국 탐사보도물 ‘트리거'를 제작하는 오쇼룡(김혜수) 팀장, 사회성 제로 피디 한도(정성일), 열정 가득한 막내 피디 강기호(주종혁). 디즈니플러스 제공

(위부터) 약자가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회적 사건의 진실을 파고드는 케이엔에스(KNS) 시사교양국 탐사보도물 ‘트리거'를 제작하는 오쇼룡(김혜수) 팀장, 사회성 제로 피디 한도(정성일), 열정 가득한 막내 피디 강기호(주종혁). 디즈니플러스 제공


영웅 서사·사적 복수 서사와는 다른 결

극 중 ‘트리거’가 방영될 때마다 소룡은 이런 멘트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한다. “약자의 손에 쥐어진 마지막 진실의 방아쇠, 트리거였습니다.” 소룡은 자신이 트리거팀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서 착한 사람들이랑 끝까지 재밌게 사는 거 보여주려고.” 닥터 트리거가 오염된 진실로 트리거팀을 공격할 때 트리거팀이 향하는 곳은 늘 피해자였고 약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진실의 방아쇠가 억울한 피해자를 생기게 할 수도 있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국대병원 중증외상센터 의사 백강혁. 넷플리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국대병원 중증외상센터 의사 백강혁. 넷플리스 제공


‘트리거’는 진지한 사회고발극이지만, 판타지물로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은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사명감으로 진실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소룡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인간의 불완전함이나 한계를 극복한 이상적인 인간, 즉 초인에 가깝다. 초인은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 저마다의 욕망이 정의로 포장되는 사회에서 소룡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존재가 있기에 사회가 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법이니까. 소룡과 비슷한 인물로 ‘중증외상센터’(넷플릭스)의 백강혁(주지훈)이 있다. 그는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타인을 위해 때로는 무능하고 불의한 시스템의 대체재가 되고, 때로는 시스템을 개혁하는 주체가 된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이들의 능력과 열정은 그간 유행한 사적 복수 서사와는 결이 다르고, 영웅 서사의 단순 반복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적 복수 서사나 영웅 서사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지만, 시스템이 부재한 가운데 나온 판타지라는 면에서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시스템 없는 현실을 되묻다

이런 판타지가 대중의 인기를 얻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에게는 소룡이나 강혁과 같은 성실하고 선한 공적 존재, 트리거팀처럼 피해자와 약자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언론, 한국대 중증외상센터처럼 이윤보다 환자를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료 시스템, 소수의 능력자에 의해 잠시 구현되는 임시적 해결책이 아닌 정의롭고 영속적인 시스템이 필요한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은 게 아닐까?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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