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시(詩)적이다. 대사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게 만든다. 교양 있는 안주인 역의 배우 김해숙은 며느리가 된 수애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너는 불치병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불행과 너를 위해 인생을 건 남자라는, 여자로서 크나큰 행복 모두를 가졌다고. 그 대사를 들으며 행복과 불행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사는 남자를 가진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불행과 행복은 의외로 함께 오는 경우가 참 많다.
위인들이나 유명인사의 성공담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씨앗은 불행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태초부터 행복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서만 해도 여러 드라마가 있다. 상처만 줬던 애인과 헤어진 끝에 비로소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남자를 만난 친구, 동료 직원과의 경쟁에서 밀려 해고당한 덕분에 훨씬 처우가 좋은 새 직장을 구한 친구, 집안의 부도로 풍요로움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돈독해진 가족애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는 선배의 일화까지…. 불행은 일종의 각성제다.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지 않는 한 불행은 불행으로만 남는다는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그리고 불행을 행복으로 역전시킨다.
행복이 불행으로 역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불행해진 로또 당첨자들이 그 예다. 벼락부자들 중엔 불신의 덫에 걸린 사람이 많다. 아내가 자신을 죽이고 돈을 차지할까봐 밤마다 베개 밑에 칼을 숨겨두고 잔다는 남자, 새벽에 발소리만 들려도 돈을 훔치러 온 도둑일까 불안해 불면증에 걸린 여자. 전부 실제 이야기다. 부를 얻는 대신 불신이라는 부산물에 잠식당한 것이다. 주변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케이스로는 행복해서 불안한 여자들이 있다. 의 주인공 캐리는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친구를 만나자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행복하기에 잃을 게 많아져 불안해진 여자의 심리다. 내 친구는 행복과 불행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월급통장을 꼽았다. 매달 받는 월급으로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먹고 싶은 걸 먹는 행복을 누리지만, 통장 잔고를 보는 즉시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행복해지면 불행을 걱정하고 불행해지면 행복을 위해 싸운다.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어쩌면 행복과 불행은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였을지 모른다.
시인 릴케는 이렇게 얘기했다. “어떤 헤어짐에도 앞서라.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대한 심연을 생각하라.” 불행이 닥쳤을 때 슬픔을 묵상하는 데 시간을 쓸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리라는 희열을 기대하며 역전을 꿈꿀지, 그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예고 없는 불행은 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에겐 언제나 자유의지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최후엔 행복하리라는 확신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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