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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맛은 처음이야!”

[KIN] [책장 찢어먹는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의 토마토 샌드위치
등록 2011-09-02 18:33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 박미향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군침이 도는 순간이 자주 있다. 예컨대 이런 식. “와타나베는 전철을 타고 오츠카역으로 향했다. 가는 곳은 코바야시 책방. 그곳에서 미도리가 ‘상상을 넘어서는 멋진’ 음식을 만들면서 와타나베를 기다리고 있다. ‘맛은 관서지방식으로 엷게.’ 계란말이, 가지찜, 삼치된장구이, 싸리버섯밥.”( 중)

‘관서지방식으로 엷게’ 낸 맛과 ‘싸리버섯밥’ 등은 정확히 와닿지 않지만, 그 식감이며 맛은 대략 상상이 된다. 삼삼한 삼치구이에, 보드라운 계란말이며 가지찜, 버섯향이 담뿍 배었을 따끈따끈한 밥… 아, 배고파.

작가가 되기 전 재즈 카페 ‘피터 캣’ 주방에 선 적도 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에서 정갈한 일본 가정식이며 샌드위치, 파스타를 자주 문장 사이에 끼워넣고, 여기에 탄산이 잘 오른 맥주를 곁들이곤 한다. 그렇게, 종종 소설은 요리책이 된다. 대충 툭툭 던진 문장도 소설가의 문장이란 옷을 입으면 왠지 더 맛깔나게 윤색되는 듯하다. 그 요리를 따라하거나 적어도 비슷한 걸 사 먹고 싶은 충동에 책 읽기를 멈추게 되기도 할 정도로.

지난 주말, 부산에 있는 동생이 친구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왔다. 우리 집에서 묵는다는데, 에서 미도리가 그랬듯 ‘상상을 넘어서는 멋진’ 음식을 차려주면 좋으련만 집에서 밥이란 것을 안 먹은 지가 3개월도 넘은 듯하다. 쌀은 화석이 되기 일보 직전이고 밥솥은 여름내 창가에서 햇볕만 쨍쨍 쬐며 전기도 없이 뜨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했다. 그럼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며 냉장고를 뒤지니, 토마토며 양파 따위가 있다. 그리고 마침, 예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이런 문장에 정체된 적이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토마토와 치즈 샌드위치. 빵에는 버터와 머스터드를 바른다. 오카다는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고 샌드위치를 자른다.”( 1권 중). 이거다. 때마침 냉장고에서 오래 잠자던 (그래서 더 숙성이 잘 되었으리라 믿기로 한) 쿰쿰한 치즈도 몇 조각 있다.

인기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다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매니저로 승격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샌드위치 맛을 좌우하는 것은 ‘기본기’다. 그러니까 얼마나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쓰느냐가 맛의 80% 이상을 정한다는 것이다. 유통기한에 임박한 나의 재료들은 기본마저 못 맞추지만 어쨌든 시도해보기로 한다. 너무 익은 토마토와 지나치게 코리코리한 치즈의 향을 무마하려고 나머지는 좋은 재료를 찾아 집을 나섰다. 종종거리며 이태원을 돌아 오스트리아 셰프가 만들었다는 수제햄을 파는 가게에 가서 햄 100g을 사고, 자주 가는 피자집에 들러 쫄깃쫄깃한 치아바타를 샀다.

집에 돌아와 기다란 치아바타를 4등분하고, 납작한 면에 마요네즈와 몇 가지 허브, 머스터드를 섞은 것을 바르고, 그 위에 치즈, 상추, 토마토, 양파, 햄을 차례차례 얹고 나머지 빵 한쪽으로 덮는다. 여기에 슈퍼에서 파는 사과주스에 무설탕 탄산수를 섞어서 유리잔에 부으면 적당히 달달한 ‘짝퉁’ 샴페인이 되는데, 샌드위치와 참 잘 어울린다. 무라카미가 음식에 맥주를 곁들이듯 같이 내놓는다. 이렇게 해서 한 상 차렸더니, 냉장고에 있던 치즈가 얼마나 오래됐을지 꿈에도 모르는 동생과 그 친구는 (욕이 아닌 칭찬으로) “이런 맛은 처음이야~”를 연발하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오늘도 이렇게, 책 한 장 잘~ 찢어먹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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