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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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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치고 분갈이할 때 새 글이 온다

고쳐쓰기는 다시 쓰기… 버리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등록 2025-03-28 17:02 수정 2025-03-28 18:43
고쳐쓰기를 할 때 두 가지 과정을 밟는다. 첫 번째는 버릴 것 찾기. 두 번째는 새로운 것 찾기. 버릴 것 찾기는 가지치기, 새로운 것 찾기는 분갈이라 할까. 글을 살리기 위해서는 글을 죽여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고쳐쓰기를 할 때 두 가지 과정을 밟는다. 첫 번째는 버릴 것 찾기. 두 번째는 새로운 것 찾기. 버릴 것 찾기는 가지치기, 새로운 것 찾기는 분갈이라 할까. 글을 살리기 위해서는 글을 죽여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봄이 되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보리수나무와 산수유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겁니다. 가지들이 곧게 자라게 하고, 같은 값이면 보기도 좋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가지가 한 방향으로 자라야 바람도 잘 통하고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 어깃장을 부리는 가지들을 잘라냅니다. 나중에 열매 딸 생각을 하면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자라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가지는 잘라주어야 합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모양새가 그럴듯한지 살피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 자르는 걸 반복하다보면 해가 집니다. 농사의 절반이 잡초 뽑기이듯이, 고치기의 절반도 ‘지우기’(삭제하기)입니다.

잘나도, 못나도 초고를 받아들여라

애써 쓴 글을 왜 고치는 걸까요? 당연히 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겠죠. 글을 몇 번 고쳐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고를 고치는 건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과정이 아닙니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초고를 고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은 초고가 만들어놓은 틀에 갇히는 것입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는 만족감에 ‘이제 다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쳐쓰기는 다시 쓰기입니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이른바 ‘둘(2)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초고를 쓴 나와 다시 쓰는 나, 이렇게 둘이 만나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식은 잘나가도 자식이고 엇나가도 자식이듯이, 꼬장꼬장하게 문제를 찾아내려는 자세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 글이 잘 자라도록 보살필까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이 또한 다시 쓰기를 여러 번 하면 자동으로 생기는 마음입니다.) 남기는 문장도 내 자식, 지우는 문장도 내 자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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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쓰기는 초고 쓰기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신나기까지 합니다. 손이 닿지 않는 장롱 위에 숨겨둔 보석함을 내리기 위해 의자 하나가 생긴 겁니다. 의자를 딛고 올라서기만 하면 됩니다. 다시 쓰기를 하다보면, 물아일체. 나와 내가 쓴 글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고쳐쓰기를 할 때 두 가지 과정을 밟습니다. 첫 번째는 버릴 것 찾기. 두 번째는 새로운 것 찾기. 버릴 것 찾기는 가지치기, 새로운 것 찾기는 분갈이라 할까요.

먼저 버릴 것 찾기. 글을 살리기 위해서는 글을 죽여야 합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잘 걷어내야 좋은 글이 됩니다. 잘난 척하는 말, 과도한 수식, 습관적으로 쓰는 보조용언, ‘공부하다’라고 해도 될 것을 ‘공부를 하다’로 늘리는 것, 다른 말과 어울리지 않는 어휘나 표현 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과한 것을 잘라내야 남은 것들이 숨을 쉬고 넉넉한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고쳐쓰기는 다시 쓰기입니다. 새로 쓰기입니다. 분갈이와 닮았습니다. 굳건히 박혀 있는 나무를 뽑아 낡은 흙은 버리고 새 화분의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다음에 퇴비 섞인 새 흙을 넣어줍니다. 좋아하는 꽃나무를 분갈이해주듯이, 나의 초고를 사랑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쁘고 대견하구나, 나의 초고. 그러니 다시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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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문장 드나들도록 문을 넓게 열고

 

다시 쓰기는 초고를 잊고 쓰는 겁니다. 그런다고 초고가 잊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늘 그런 식입니다. 잊은 듯하지만 잊을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집니다. 말은 한 순간에 한 문장밖에 내뱉을 수 없지만, 우리 머릿속은 먼저 썼던 문장과 지금 쓰는 문장이 겹쳐집니다. 무엇이 더 나을지 견주게 됩니다. 초벌 그림 위에 새로 그리는 수채화 같습니다. 흐리게 밑그림이 배어나오지만, 전혀 다른 그림입니다.

다시 쓰기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글의 구조입니다. 내용을 담는 구조(구성과 흐름)입니다. 맞춤법이 아닙니다. 맞춤법에는 신경을 꺼주세요.

우리는 ‘구조’ 또는 ‘구성’이라는 말을 다소 경직되게 써왔습니다. 글의 구조를 건축학에서 쓰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건축학에서 구조는 ‘기초, 층별 구조, 위계질서, 정밀한 계측’ 등 고정된 조직과 설계와 같은 의미로 씁니다. 마치 어딘가에 정답이 있는데, 내 글이 거기에 못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쓰기는 정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글의 구조는 건축학이 아니라 생물학에서 다루는 구조에 가깝습니다. 생물학적 의미에서는 ‘생태계의 구조’나 ‘유기체의 구조’와 같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를 말합니다. 이때의 구조는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우연적입니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전혀 생소한 것입니다. 앞의 글과 비슷하면서도 앞의 글과 전혀 다른 글입니다. 완성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미완성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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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글을 견고한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파닥거리는 생물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써놓은 글에 갇혀 대충 조몰락거려 글을 완성하려 들지 마세요. 다른 생각과 문장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최대한 넓게 열어놓으세요. 모든 글은 하나의 구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글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구조를 이루지만, 구조가 만들어지는 순간 또 다른 구조가 자라납니다. 그걸 다시 쓰기 과정에서 불러와야 합니다. ‘내 글 속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새로운 글이 숨어 있다.’ 그 녀석을 나오라고 해야 합니다.

다시 쓰기를 하면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처음 썼던 글에서 ‘이거다’ 싶었던 단어나 문장이 별것 아닌 것이 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위치로 가는 게 어울릴 때도 있습니다. 순서를 완전히 뒤집는 경우도 있고, 결론이 정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쓰기를 거듭하는 인간적인 사람

언젠가 ‘인간적인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 인간적인 사람일 확률이 높은 이유는 어쩌면 다시 쓰기를 거듭하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확고하지 않다. 언제든 뒤집어엎어질 수 있다. 아무리 소중한 것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고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런 마음은 끊임없이 새로 써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나답다고 생각한 것을 버리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질락 말락 하는 기우뚱함, 가장 견고하다고 믿었던 내 안의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릴 때의 희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생각하던 찰나에 주머니에 든 걸 몽땅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허무해지지만 한편으론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나는 이제 무적이 되었다는 느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은 이번 독자 투고에 영희님이 보내주신 글의 일부입니다. 영희님은 다시 쓰기 방식으로 세 편을 썼습니다. 첫 부분이 어떻게 바뀌는지만 봐도, ‘다시 쓰기’의 매력과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① 근로기준법 제54조에 따르면 4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는 30분 이상의 휴게 시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 시간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노동자의 자유다. 8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라면 그 시간은 배로 늘어난다. 영희는 그 낯선 문장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휴게, 보장, 권리… 모든 단어가 낯설었지만 ‘자유’라는 말은 특히 생선 가시처럼 계속 목구멍 어딘가에 걸렸다.

② 정오를 알리는 벨이 울리자마자 공장에 가득 찼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썰물이 되어 갯벌에 생겨난 키조개 구멍처럼 군데군데 빈자리를 쳐다보며, 영희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30분 동안 뭘 할까?

③ 정오가 되자 공장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켜고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어떤가요. 영희님은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구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영희님에게 빙의하여 설명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근로기준법을 언급하면서 잔뜩 힘을 주고 있습니다. ‘30분’ 쉬는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되물었을 겁니다. 노동자의 휴식 권리를 담은 근로기준법이 떠올랐겠죠.

두 번째 글에서는 근로기준법 얘기를 싹둑 잘라내고 공장 동료들을 묘사하는 걸로 바꿨습니다. ‘근로기준법’이 덜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힘이 들어가다보니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30분 휴식 시간의 의미를 굳이 근로기준법에서 찾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을 겁니다. 30분의 ‘의미’를 얘기하는 것마저 불필요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갯벌에 생겨난 키조개 구멍처럼 군데군데 빈자리를 쳐다보며’라는 문장은 얼마나 실감나는 표현인가요. 그런데도 영희님은 이걸 다시 엎어버렸습니다. 그러곤 자신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켜고 타이머를 맞췄다.’

‘정오가 되자 공장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켜고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영희님이 쓴 글이다. 그의 글은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구조’를 찾아가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달리3’ 기반 코파일럿에 공장에서 글 쓰는 여성을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정오가 되자 공장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켜고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영희님이 쓴 글이다. 그의 글은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구조’를 찾아가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달리3’ 기반 코파일럿에 공장에서 글 쓰는 여성을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당신은 왜 글을 씁니까

물론 마지막 글이 앞의 글보다 나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다만 시각장애인이 지팡이질을 멈추지 않듯이, 다음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기대 속에서 성큼 발을 내디딘 겁니다. 새로운 글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 그 모험을 즐기는 겁니다.

다시 쓰기를 거듭하다보면,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와, 내 속에 이런 면이 있구나. 다 버릴 수 있어.’ 버리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고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않게 됩니다. 꽃은 사랑해도 지고, 잡초는 싫어해도 핀다는 삶의 이치를 글쓰기에서 배웁니다.

다 왔습니다. 도착지에서 다시 묻게 됩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여러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글쓰기를 통해 삶과 생명을 긍정하기 위해 쓴다고 생각합니다. 내 속에 여러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내 삶의 우여곡절도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에 다시 놀라기 위해.

이제 고쳐쓰기(다시 쓰기)까지 다뤘으니, 성글긴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더 나올 게 없습니다.

그래도 다음 회에 글을 더 써보려고 합니다. 뻔뻔해 보이겠지만,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버티려고 합니다. 드디어 무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잖습니까, 하하.

※맞춤법을 지키는 것은 필요합니다. 억울한 일이지만 독자는 띄어쓰기를 잘못한 글을 보면 ‘작은 실수를 했군’ 하면서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것도 모르다니 무식하군’ 하며 글쓴이를 무식쟁이로 만들어버립니다. 내용마저 평가절하합니다. 내용을 살필 때는 내용만 봐야 합니다만, 그걸 다 마치고 난 다음엔 따로 시간을 내어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집중하여 고쳐야 합니다. 한국어는 의존명사, 어미, 접사, 보조용언, 표준어 등에 대한 규정이 까다롭습니다. 어떻게 쓸지 ‘아리까리할’ 때엔 사전을 보면서 정확하게 고쳐야 합니다. 맞춤법을 설명한 책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기본 원리를 익히고 사례별로 기억을 쌓아가다보면 사전이나 참고서적을 뒤적거리는 횟수가 줄어들 겁니다. 맞춤법을 설명한 책은 고만고만합니다. 설명이 장황하지 않고 예가 많이 나온 것이면 뭐든 좋습니다. 맞춤법뿐만 아니라 책 편집 과정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책을 구해 읽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24’를 권합니다.

[독자 글]

‘마구 쓰기’에 여덟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두 편에서 세 편을 보내주셨는데, 어떤 분은 내용 구성을 달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기본 뼈대’(구조)를 유지하면서 부분 수정을 하셨더군요. 처음 글을 마음속에 품고 있되, 글을 새로 쓴다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를 하면 같은 주제라고 해도 글의 흐름(구조)이 각양각색으로 달라진다는 것에서 생기는 기쁨이 있을 겁니다.

생활의 성실함과 함께 필요한 글쓰기에서의 성실함(수오(SUO)님), 시험 전날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원영님), 3월에 개강하는 대학의 교직원으로 있으면서 느끼는 시간에 대한 감상(주영님),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시간과 협업하기(정선님), 연락이 닿지 않은 지인에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 깨달은 ‘어떻게 지내요?’라는 말의 소중함(선옥님), 동네 빵집이 유명해져서 매번 빵을 사지 못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상념(영미님), 주고받은 문자에 담긴 한마디 표현 때문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은 집 매매 이야기(풀레님)를 보내주셨습니다.

본문에서 다뤘던 영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영희님은 쉬는 시간을 글쓰기에 쓰면서 생긴 일을 써주셨습니다.

 

정오가 되자 공장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켜고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공장 앞 순댓국밥집으로 제일 먼저 몰려간 아저씨들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뚝배기를 받았을 것이다. 분식집에 간 언니들은 라볶이를 먹을지 치즈라면을 먹을지 아직 고민하고 있겠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미경씨는 오늘도 점심을 거르고 공장 주변을 빙빙 돌고 있을 테고, 퇴근 후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준호씨는 점심시간도 아껴 공부한다지만 인터넷강의를 틀어놓고 단잠에 빠지기 일쑤다. 25분47초. 영희는 남은 시간을 흘끗 확인하고 깊은 바다에 빠져들려는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영희는 매일 정오마다 다른 세계에 다녀온다. 그 세계에서 영희는 마감을 코앞에 둔 작가다.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그 안에 글을 마쳐 보내야 한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도 참고, 담뱃불 붙이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다보면 왠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자꾸 숨을 참게 된다. 22분19초, 아직도 이야기의 결말을 정하지 못했다. 퇴고할 시간은 있어야 할 텐데. 19분34초, 다시 보니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불필요한 진술도 눈에 띄어 몇 문장을 지운다. 16분, 이 결말의 키를 누구에게 주지? 12분29초, 아무리 봐도 다 고만고만하다. 9분57초, 슬슬 숨이 차오르는데….

“영희씨! 거기서 뭐 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참았던 숨을 들이마시듯, 공장의 영희가 황급히 고개를 든다. 앞머리가 땀으로 젖은 미경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남들 쉴 때는 영희씨도 좀 쉬어. 뭐 하러 점심시간까지 일을 붙들고 있어?” 타이머가 울린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빈자리를 덮는다. 이 세계의 영희도 제자리를 채운다. —영희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어떤 말은 나를 사로잡습니다. 짧은 말 한마디로 마음이 녹기도 하고 얼어붙기도 합니다. 인생의 지축이 흔들리기도 하죠. 여러분을 사로잡은 말 한마디를 중심으로 글 한 편을 보내주세요. 그 한마디 말을 어디에 배치할지를 고민해보기 바랍니다. 맨 앞일지, 가운데일지, 마지막일지. 한 번만 쓸지, 두 번 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그 한마디 말이 더욱 빛나고 독자마저 사로잡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주세요.

 

주제: 그 한마디

분량: 800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5년 4월6일

보낼 곳: han21@hani.co.kr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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