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지 않은 척하는 자의 해장

<심야식당>의 ‘어제의 카레’

카레밥. 한겨레 박미향

눈을 떴다. 새벽 5시30분. 나는 밖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씻으려고 화장실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가는데, 빨래바구니에 넣어둔 이불이 밖으로 나와 세탁기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라, 이게 왜 여기 있지?

다음날 아침, 그날따라 엄청 피곤해 보이는 주말에 만나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저 이불이 왜 저기 나와 있는지 알아?” “어휴, 어제 잔뜩 취해서는 가서 좀 씻으랬더니 저거 뒤집어쓰고 자더라.” “…. 어떡해, 저거 개똥 묻은 건데.”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신록이 푸르른 5월은 꽐라(술에 만취된 상태)된 자의 진상으로 찬란한 달이었다. 하아, 요즘은 내가 아닌 것 같아…. 그날, 주말에 만나는 남자는 술 취한 나를 업고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실어나르고는 피로로 주말을 망쳤다. 또한 나는 취객의 행동 수칙 ABC도 철저하게 지켰다. 갈지자로 걷기, 혀 꼬인 말투로 생떼부리기, 속에 든 것 처절하게 게워내기. 아무리 취해도 세수만큼은 철저히 했던 습관도 내던져버렸다. 꿈속에서 외출이라도 할 태세로 화장, 시계, 렌즈, 스타킹 등 완전 착장 차림 그대로 침대에 기어들어가기가 다반사. 집에서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던 강아지는 무슨 죄로 취한 주인과 함께 난데없는 새벽 훈련에 돌입해야 한단 말인가!

주말에 만나는 남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술 잘 마신다는 칭찬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넌 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가졌을 뿐이야!”

술 안 취한 척 멀쩡한 얼굴로 가고 싶은 식당이 있다. 아베 야로의 만화 에 나오는 ‘심야식당’.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문을 열고 메뉴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맥주, 청주, 소주뿐. 나머지는 알아서들 주문하면 주인장이 만들 수 있는 한 만들어준다. 책은 벌써 6권까지 나왔고, 6월에 7권이 발매 예정이다. 그동안 다양한 요리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만큼, 이 독특한 시스템의 식당에 보이는 독자들의 관심도 밀도 있게 쌓였다. 포털 검색창에 ‘심야식당’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면 관련 이슈들이 줄줄이 뜬다. 동명 드라마 리뷰부터, 심야식당에서 주인공들이 시켜 먹은 메뉴를 따라해봤네, ‘어디 심야식당 같은 데 없나요?’ 하는 질문들까지.

나도 묻고 싶다. 어디 심야식당 없나요? 만약 만화 속 심야식당이 그 모습 그대로 현실에 튀어나온다면, 나는 1권 2화에 나오는 ‘어제의 카레’를 시켜먹을 거다. 냉장고에서 하룻밤 잠자고 나온 카레를 따뜻한 밥 위에 얹어 조금씩 녹여가며 먹는다.

커리전문점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카레 요리는 시중에 나오는 분말이나 고형 카레에 각종 채소와 고기를 넣어 끓여내기에 집에서나 밖에서나 맛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먹는 카레가 맛있다. 집에서 먹듯 한 솥을 끓여놓고 오늘도 카레, 내일도 카레, 어제도 카레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딱 원하는 질감의 원하는 농도로 맞춰진 어제의 카레 한 그릇이면 난 취하지 않은 척하는 얼굴이 아닌 정말 취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단정한 걸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외출복을 입고 잠든 나는 꿈속에서 심야식당에 찾아가 어제의 카레를 시킨다. 숟가락을 손에 꼭 쥐고 이 한 그릇을 어떻게 맛있게 먹을 것인가 궁리한다. 하나, 카레가 녹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밥을 꼭꼭 씹어먹어야지. 둘, 내장을 찰랑찰랑 채운 술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때, 그보다 향이 짙은 카레로 몸 안의 알코올을 꼭꼭 다져 눌러야지.

신소윤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