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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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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이니까 임수경으로 살아”



1989년 방북해 통일이란 거대 담론 짊어진 20대,

개인적으로 가혹했던 30대 보내고도 담백하기만 한 쾌활함
등록 2010-08-25 15:52 수정 2020-05-03 04:26
임수경.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임수경.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내게 1989년 여름은 유달리 더웠다. 그해 3월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가, 경찰 수습기자로 여름을 나야 했기 때문이다. 경찰서에서 자고, 병원 응급실, 유치장 등을 돌아다니며 ‘기자질이 나한테 맞는 건가’ 의심하던, 가뜩이나 덥던 그 여름에 대학생 한 명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임수경이라는 여대생이 당시로선 갈 수 없던 땅, 평양에 간 것이다. 두 달 가까이 경찰 출입 기자들 발에 불이 붙었지만, 내 관할구역 밖의 사건이었고 수습이던 나를 그 취재에 차출하는 일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기자질이 내게…’ 의심하며 덥고 무료하게 지내다가 여름 끝자락에 검찰 출입 기자 발령을 받았다.

그렇다고 사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내 적성에 대한 의심은 그대로였고, 새 출입처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초가을 어느 날,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9층 공안부 복도를 아무 생각 없이 어리바리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흰 수의의 여자가 교도관 두 명과 함께 걸어왔다. 임수경이었다. 임수경이 평양에서 돌아와 곧바로 안기부에 구속된 게 한 달쯤 전이었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뉴스 가치가 아주 높은 인물이었다. ‘검찰에 송치된 모양이구나!’ 명색이 기자라면 그 자리에서 당연히 몇 마디 물어야 할 것 아닌가. 놀란 채로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사이에 임수경은 교도관들에 둘러싸여 다른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잠깐, 한 3~4초 정도 그도 나를 봤던 것 같다.

그때 임수경은 정말 예뻤다. 그렇게 예쁜 이가 갇혀 있는데, 말 한마디 못 건네고, 취재도 못하고, 띨띨한 놈! 검찰청 복도에서 역광을 받은 그의 실루엣이 머리 안에 사진으로 남았다. 그 뒤로 임수경의 재판을 쭉 취재했다. 당시가 공안 정국이어서 시국사범이 넘쳐났다. 그들 모두 말을 잘했지만, 특히 임수경의 말은 담백했다. 장황하지 않고, 운동권의 상투적인 표현이 없으면서 생기가 흘렀다. ‘통일의 꽃이라고 할 만하구나!’ 그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 반 동안 갇혀 있다가 1992년 성탄절에 풀려났다. 얼마 지나 신문사에 찾아왔고, 몇몇 기자들과 술을 마셨다. 나도 거기 끼었다. 검찰청 복도에서 본 일을 말했더니, 임수경은 대머리 까진 남자를 본 것 같다고 했다. 구속된 뒤 처음 본 민간인이어서 ‘날 좀 구해줘!’ 하고 맘속으로 막 외쳤단다.

임수경은 술을 좋아했다.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했고. 큰일 벌이고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쾌활했다. 그때가 임수경의 20대였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임수경은 이런 말을 했다. “그때(평양 갔을 때) 만 스무 살이었어. 뭘 얼마나 알았겠어. 그런데 나와보니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져 있는 거야. 그래도 20대 땐 임수경으로 살았는데, 30대 땐 임수경이 아니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안 되더라. 지금은 다시 임수경으로 산다고 생각해. 사람들도 만나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되는 게 있어요. 아무리 다른 옷을 입으려고 해도 안 되는 거지. 그럴수록 더 나빠지기만 하고….”

돌이켜보니 임수경은 30대에 정말 그랬던 것 같다. ‘통일의 꽃’이라는 이미지에, 과거의 후광에 갇히지 않고 사회 전문 영역에서 현재의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여러 가지 모색을 했다. 난 그와 단골 술집이 같고 어울리는 사람들도 비슷해 자주 보면서 그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중 앞에 나서고, 박수와 갈채를 받는 일을 자제하길 바랐던 것 같다. 아무래도 임수경의 전력은 그에게 버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라도 그러지 않을까. ‘통일의 꽃’이라는 거대한 호칭에 부응할 만한 실천의 길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세상은 구체적·미시적으로 변하는데 그만이 거대 담론의 상징으로 묶여 있다면 그 삶이 공허하지 않을까.

“임수경이 아니려고” 노력하다가도, 사람 좋아하는 임수경은 대중이 부르는 자리에 나가곤 했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임수경에겐, 인기를 즐기는 아이돌 스타 같은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 쾌활함이 임수경의 장점이었는데, 이후 일들이 가혹했다. 결혼했다가 이혼한 건 그렇다 쳐도, 하나뿐인 아이가 죽었다. 그 뒤 절에 1년 반 있었고, 2년은 외국에 나가 있었다. 난 그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알지 못한다. 짐작조차 못한다.

얼마 전부터 임수경은 다시 쾌활해 보였다. 한동안 취하면 울더니, 요새는 안 운다. 과거를 돌이킬 때의 말이 담백하다. 스스로를 거리를 두고 보는 것 같고, 그렇게 견딜 만한 거리를 찾은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알아보잖아. ‘임수경씨?’ 하고는 바로 그 뒤에 ‘내가 당신 때문에’ 하면서 이어지는 말들이 만만치 않을 때가 많아요. ‘당신 때문에 군대에서 얼마나 맞은지 아냐…, 당신 때문에 여자와 헤어지고…, 당신 때문에 다른 길을 갔고….’ 그런 소리 워낙 듣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책임감을 갖게 되더라고.” 요즘 그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대학에서 신문방송학 강의를 하고,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고, 트위터를 열심히 하고, 술도 자주 마신다. “술? 많이 안 먹어. 매일 마셔서 문제지.”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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