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에 들어온 지 25년. 그의 삶은 잘 안 풀렸다. 영화판에 그쯤 있었으면, 지금은 잘 못 나가더라도, 오래도록 잘 못 나갔더라도, 잠시나마 한 번쯤 호시절이 있었을 법한데, 그는 안 그랬다. 그럼 글감이 안 된다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아니냐고? 영화판에서 나이 좀 든 이들은 모두 그를 기억한다. 물론 ‘잘 안 풀리는 이’로. 그리고 글은 좀 다르지 않을까. 저명한 외국 소설가가 그랬다. 누구든 ‘인생은 무조건 실패’이며 ‘소설은 실패의 기록’이라고.
이문형(49)이라는 영화 프로듀서의 이야기다. 프로듀서로 나선 지 15년이 넘었는데, ‘프로듀서’로 실제 영화 크레디트에 이름이 오른 적이 없다. 준비하다 엎어지고, 다 될 법했는데 막판에 돈이 안 들어오고, 다 찍어놓고는 복잡한 사정으로 영화 크레디트에서 이름이 빠져버리고…. 만화 에 나오는 ‘고길동’이라는 캐릭터를 기억하는지. 말썽 부리는 둘리 일행을 까칠한 눈으로 째려보며 징계를 가해놓고는 뒤에 후회하는 소시민. 이문형의 얼굴은 고길동을 닮았다. 여러 사람 모인 자리에서 내가 ‘고길동’ 하고 부르면, 이문형을 잘 몰랐던 이들도 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대번에 알아듣고 낄낄 웃는다. 실제 사람이 만화 캐릭터를 이만큼 닮기도 힘들 거다. 특히 까칠한 눈빛이 닮았다. 신경질과 짜증이 잔뜩 서려 있지만 악의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자기만 손해 보고 말게 하는 그 눈빛.
이문형은 대학 때(연세대 사회학과) 학보사 기자를 열심히 했다. 데모 많이 하던 5공 시절, 그 역시 군부 정권을 미워했지만 운동권에도 불만이 많았단다. 그 덕(?)에 그는 편집장까지는 못했는데, 당시 다른 대학 학보사 편집장 했던 이들과 지금도 모임을 한다.
졸업 뒤 이문형은 몇몇 잡지사 기자를 거쳐 1986년 ‘화천공사’라는 영화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3년, 영화사 ‘신씨네’로 옮겨 5년 있는 동안 홍보와 기획 일을 했다. 영화 기자들이 영화사로부터 촌지를 받는 관행이 남아 있던 당시였다. 홍보 담당인 이문형도 촌지를 돌릴 수밖에 없었고, 정권과 운동권 모두를 향해 있던 그의 까칠함은 급기야 기자들을 향해서도 들풀처럼 자라났다. 내가 그에게서 ‘둘리를 째려보는 고길동의 눈빛’을 발견한 건, 1999년 영화기자가 돼 그를 만났을 때다. 그는 여차하면 이랬다. “너 (영화에 대해) 뭐 알고 쓰냐?”
이문형은 잡다하게 아는 게 많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성격도 두루뭉수리한데 그는 누가 허튼소리 하거나 뻥을 좀 치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술자리에서 술 잘 마시다가도 바로 싸움닭이 되곤 한다. 이렇게 까칠한 이들은 대체로 모진 구석이 있는데 그는 심성이 착하고 여리다. 이쯤 되면 최악이다. 아니, 최적격이다. 어디에? 인생 잘 안 풀리는 데에! 영화사를 나와 독립 프로듀서로 나서면서 ‘잘 안 풀리는 이문형’의 이야기는 정점에 오른다. 한-미 합작에 현지 올 로케라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가지고 미국에서 만든 영화가 투자자의 부도와 도피, 후반작업 중단 등의 고난을 겪다가 결국 영화는 이문형의 이름을 크레디트에서 뺀 채 개봉했다. 부산에 가서 ‘라이트하우스 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차리고 5년간 작업했던 프로젝트는 최종 단계에서 투자가 안 됐고, 그는 빚더미에 앉게 됐다. 그러는 사이 그의 후배들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내로라하는 프로듀서가 됐다. 그리고 몇 해 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미국 대통령과 동갑이 됐다(그는 오바마와 61년생 동갑이다).
이문형은 술 마시면 박인수의 를 박인수보다도 더 박인수처럼 부른다. 오래전에 술집에서 를 부르는데, 옆에 진짜 박인수가 와 있었단다. 그 노랠 듣고 박인수가 이문형에게 그랬단다. “너 노래 잘한다. 그런데 니 노래 불러라.” 이문형은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네 길’을 ‘인생은 나이롱 뽕’이라고 개사해 부른다. 조금은 자조가 담긴 듯도 한데, 그의 인생이 나이롱 뽕? 이문형은 여전히 프로듀서에 올인하고 있으며, 요즘도 일거리와 읽을 거리를 싸들고 영화사에서 밤새우곤 한다. 그리고 영화판엔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하는 후배들이 많다. 잘되겠지? 반전이 있을 거다? 그에겐 희망이 있다? 젠장,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글 맺기 되게 힘드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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