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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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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 많은 마이너 인생

취향·성향·이념 모두 비주류, 퀴어 영화 찍는 쾌활한 게이 감독 김조광수
등록 2010-06-30 21:15 수정 2020-05-03 04:26
김조광수(46·청년필름 대표).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김조광수(46·청년필름 대표).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주류, 또는 메이저 쪽과 이렇게 거리가 먼 이도 많지 않을 거다. 김조광수(46·청년필름 대표)는 1997년부터 영화를 제작해왔는데, 상당수가 예술영화로 취급받거나 저예산이었다. 때깔 좋은 상업영화를 안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하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그의 이미지는 충무로 주류보다 독립영화인 쪽에 가깝다. 그는 성 취향도 마이너 쪽이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며, 얼마 전부터 영화 연출도 하는데 모두가 동성애를 다룬 퀴어 영화다. 그럼 정치적 성향은? 그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김조광수는 게이답게 옷도 잘 입고, 어디 가서도 재밌게 잘 떠든다. 쾌활하고 부지런하다. 40살 이전에는 별명이 마이클 제이 폭스였는데 그 뒤엔 마이클 더글러스가 됐단다. 어떨 때 보면 그 둘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주량은 적지만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우스개 잘하고, 권위적이거나 마초적인 구석은 전혀 없다. 하지만 취향, 성향, 이념을 다 마이너 쪽에 두고 살면서 곡절이 많았을 거다.

그가 자기 성 취향이 남과 다름을 안 건 중학교 3학년쯤이었다고 한다. 친구들끼리 도색잡지를 돌려 읽을 때, 잡지 안의 여자들보다 잡지를 보고 흥분하는 친구들에게 더 눈길이 갔단다. 대학(한양대 연극영화과)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대에 끌려갔고 거기서 고참 한 명과 사귀게 됐다. 하지만 그 고참은 여자친구가 있었고, 또 스스로도 동성애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헤어졌다가 둘 다 제대한 뒤 고참이 찾아와 다시 만났고 ‘사랑’이라는 단어까지 나오면서 여관에 갔단다. 그때, 1980년대 중·후반까지도 ‘임검’이라는 게 있었다. 경찰이 여관에 들어가 임의로 투숙객들 신분증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김조광수와 고참이 있던 방에 경찰이 들어왔고, 나가면서 “너희들 남자들끼리…, 더러운 놈들…” 등의 야유를 퍼부었다고 한다.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그날 이후로 그 고참을 보지 못했다.

김조광수도 복학해서 학생운동에 몰두하면서 동성애의 욕망을 접었고 일부러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당시 그는 민족해방(NL) 계열이었고, 그 관점에서 보면 동성애는 ‘미 제국주의의 찌꺼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 1980년대 말 종로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에 쫓겨 파고다극장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에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걸 봤고, 그 뒤로 가끔씩 파고다극장에 갔다. 물론 좋은 영화를 상영할 때 갔다(스스로에게 들이댈 핑계가 필요했단다). 그 극장에서 대기업을 다니던 또래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는 나중에 돈 벌어서 스웨덴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곳엔 동성끼리의 결혼도 가능하고, 동성애자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고….” 김조광수는 그때 개안을 했다. ‘그런 세상이 있구나! 그런 게 가능하구나!’ 삶의 목표가 새로 설정됐다. ‘동성애자의 권익 신장과 인권 보호를 위한 운동을 하며 살자!’

내가 김조광수를 알게 된 건, 1999년 영화기자를 하면서였다. 그때 청년필름은 명필름과 합작으로 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 뒤 청년필름이 내놓은 등이 장사가 잘 안 됐다. 그와 제법 친해졌을 때 그는 내게 자기가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고 했다. 라는 초저예산 퀴어 영화였다. 내 역할은, 20대 초반의 남자 주인공을 돈 주고 사서 섹스하는 중년의 게이였다. 일종의 베드신으로, 나는 팬티만 입고 떠드는 장면을 열두 번 정도 찍었다. 저 장면이 스크린에 나오면 쪽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촬영 뒤 뒤늦게 들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감독이 내 출연 장면을 다 덜어냈다(주인공 남자를 애무하는 내 뒤통수만 영화에 잠깐 나온다).

그 뒤로 김조광수는 내 매니저를 하겠다고 해놓고는, 내가 출연할 영화를 섭외해오기는커녕 자기 스스로 감독이 돼 영화 찍기에 바빠졌다. 단편 세 편을 찍었고, 이제 장편 을 준비 중이다. 모두 퀴어 영화인데, 그는 한 우물을 파기로 작정한 듯하다. 현명해 보이는 게, 퀴어 영화는 적지만 일정한 관객층을 확보하기가 쉬울 거고, 어차피 그가 찍는 영화가 저예산이고 보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모델이 생길 것 같다. 아울러 20년 전 파고다극장에서 만난 남자를 매개로 갖게 된 새로운 목표, ‘동성애자의 권익 신장과 인권 보호’를 이뤄가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난해 요맘때쯤 그를 만났더니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몸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했다. 일종의 갱년기 증상인 듯했다. 그런데 최근 보니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준비 중인 장편영화에 여성영화제가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고 자랑도 했다. 얼마 전까지 그의 블로그 이름이 ‘피터팬의 식탁과 침대’였다. 마이너 쪽에 있을수록 더 건강해야 할 거다. 늙지 않는 피터팬처럼!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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