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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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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여전한 건 자유로 드라이브



담백하게 사고했던 ‘이과’스러움 벗고 이제는 세상 푸념하는 어쩔 수 없는 아저씨가 된, 친구 김성수
등록 2010-07-27 21:39 수정 2020-05-03 04:26

자유로가 언제 생겼더라? 자료를 뒤져보니 1992년에 통일전망대까지 닦였고, 1994년에 임진각까지 완공됐단다. 그러면 그 도로가 생기자마자인 1992년부터일 거다. 툭하면 자유로에 갔다. 그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시야 가득 평원이 펼쳐진다. 시야가 트이는 만큼 가슴도 트이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통일전망대를 지나면 임진강 건너 북한이 내다보이는데, 나지막한 산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그 풍경도 최소한 시각적으로는 아늑하다. 저녁땐 그 임진강 너머로 해가 떨어진다. 어쩌다 오후 한때 소나기가 왔다가 갠 날 같으면 해 질 때 자유로 일대에 노을이 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김성수(48).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김성수(48).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1992년부터 지금까지 자유로를 함께 드라이브해온 친구가 있다. 내게 자유로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것도 이 친구였다. 김성수(48)라는 친구로, 나와 대학 동기이며 수학과를 나왔다. 지금은 부동산 경매정보를 알려주는 인터넷 회사의 대표다. 이 친구는 차를 일찍 가져서 1980년대 말부터 몰고 다녔는데, 나는 가끔씩 그 차를 타고 그가 모는 대로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차를 몰고 우리 집에 와선 “새로 생긴 좋은 길이 있는데 가보자”고 했고, 가보니 정말 좋았다.

그 뒤로 김성수를 만나선 여차하면 자유로를 달렸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냥 창밖을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별로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조용히 달리고, 그러다가 배고프면 밥집에 내려서 뭘 먹고, 당구장이 나오면 당구 한 게임 치기도 하고, 파주 출판단지 안에 극장이 들어선 뒤론 가끔 거기서 영화 보기도 하고…. 쉽게 말해 그냥 어슬렁거리는 거다. 다 큰 남자 둘이서 그 짓을 한 달에 2~4회씩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는 게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그 시간이 그렇게 편안하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자유로가 확장되고 정비되면서 길 맛이 옛날만 못해졌달까.

내 다른 친구들에 비해 김성수는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다. 나와 친한 친구 중에 유일하게 이과 출신이다. 난 이게 많은 걸 설명하는 것 같다. 문과 출신들은 대체로, 그중에서도 언론이나 문화 계통에 종사하는 이들은 더욱더, 자기 견해, 세계관, 자아 같은 것들에 아집이 있다. 예민한 만큼 자폐적이거나 공격적이기 쉽고, 논쟁적인 만큼 관념적이기도 하다. 아울러 남들과의 차이나 거리를 잘 인정하지 못해서, 동지 아니면 적으로 만들고 마는 경향이 있다.

김성수는 그렇지가 않다. 차이나 다름을 잘 인정할 줄 안다. 음식, 스피커 등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선 까다로울 때가 있지만, 생각이나 취향 등 관념적인 것들에 대해선 너그럽다. 언어나 사고도 구체적이고 담백해서, 김성수라면 ‘고독하다’라는 말 대신 ‘심심하다’라고 말하고, 영혼이 아프네 어쩌네 하는 식의 엄살과도 거리가 먼 스타일이다. 그와 얘기를 하면 어떤 사안에든 열 올리며 말려 들어가기보다 편안하게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게 20년 가까이 둘이 차 타고 자유로를 어슬렁거릴 수 있게 하는 비결일 거다.

김성수의 그런 모습은 기싸움이 난무하는 한국의 수컷 사회에서 기가 약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대학 때 그는 학생운동에 관여했는데 그 속에서 인간관계에 적잖게 치였다. 그 뒤 자의 반 타의 반 미국으로 유학 갔고 엉뚱하게 사회학을 공부하다가 들어와선 이런저런 개인 사업을 하다가 하와이로 건너가 7~8년 살기도 했다. 81학번인 내 또래를 보면 같은 운동권 출신 가운데 문과 출신들보다 이과 출신들이 더 잘 모이는 것 같다. 대학 땐 이과 쪽 운동권이 문과보다 훨씬 소수였는데, 몇 안 되는 이들끼리 자주 싸우는 것 같더니 싸우다 정든 건가. 지금 김성수가 다니는 회사가 속한 그룹 계열사에도 그 당시 서울대 자연대 운동권 출신이 몇몇 모여 있다.

술? 술을 전혀 못하다가 나이 들면서 술이 느는 이들이 있다. 김성수도 그런 쪽이다. 전에 비해 술이 많이 늘었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길 좋아하는데, 한번 마시면 제법 마신다. 그런데 요즘엔 전에 없던 푸념이 생겼다. 사는 게 뭔가 싶고…, 이렇게 살면 되는 건가 싶고… 등등 ‘이과 출신스러움’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말들을 한다. 이과 출신도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나 보다. “반듯한 회사 대표에 돈도 잘 벌면서 반백수 앞에서 뭔 소리야?” “네가 상팔자지. 넌 몰라서 그래. 이 스트레스를….” 내일모레 50살을 앞둔 남자 둘이서 그런 소리 하면서 자유로를 달린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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