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환(41)의 작품에선 술 냄새가 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유행가’ 연작은 ‘유행가’라는 제목부터가 맨 정신을 배척하는 것 같았다. 캔버스에 위장약, 두통약 따위 알약을 붙여서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으로 이어지는 노래 의 가사를 적어넣은 에 이르면, 술 냄새뿐 아니라 과음으로 인한 토사물의 냄새까지 풍긴다. 싼 술을 폭음하고 다음날 괴로워서 위장약, 두통약 먹고 하면서, ‘언젠간 가겠지’ 했더니 벌써 가버린, 그 ‘청춘’이라는 단어도 술을 부르지 않는가.
자개 무늬의 기타, 빨간색 기타, 목이 두 개인 기타 등 여러 가지 기타에 ‘남자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연작은 또 어떤가. 기타 잘 치고 싶은 욕망, 마초적인 남자 문화에 길들여지던 와중에 드물게 가졌던 감성적 욕구를 ‘남자의 길’이라고 일반화해버린 결과, 결국 들통 나고 마는 건 그 허약한 로망 안에 담긴 과잉과 허세였다. 술 취해 감정 과잉의 열변을 토하는 이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알코올 냄새가, 작품 속 촌스러운 형상의 기타들에서도 스며나오는 것 같았다. 이상한 건 그 알코올 냄새까지도 달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아이디어가 반짝반짝하는 배영환의 작업들은 언론에도 많이 소개됐다. 무료 급식소, 공중화장실 위치 등 노숙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수첩에 담아 나눠준 ‘노숙자 수첩’, 컨테이너 안에 도서관을 꾸려 전국의 필요한 곳에 보내는 도서관 프로젝트 등등. 지난해 그는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냥 보면 세련되고 멋진 샹들리에로, 임상수 감독의 에 나오는 대저택의 샹들리에가 이 작품이다. 자세히 보면 병 조각들을 철사 줄로 엮어놓았고, 병 조각은 대부분 소주, 맥주병 조각이다. ‘겉으론 멀쩡하고 번드르르하지만 속은 다 깨져 있고, 그 조각들이 겨우 외양만 유지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굴러가는’(배영환의 표현) 이 사회, 혹은 인간들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술병 조각? 아무래도 배영환에게 술, 혹은 술병은 하찮게 여겨질 만큼 친숙한 존재인 듯하다.
배영환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술을 마셨다. 한양대 안 숲이 그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숲의 큰 바위에 오르면 한강까지 내려다보였다. 거기서 술 마시다가 새빨간 노을을 봤다. “사춘기의 상실감, 엄청난 센티멘털함, 아무런 이유 없는 순도 100%의 감정, 그런 게 밀려왔다. 나중에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를 보니 딱 그때의 노을 같았다. 그 노을이 내 사춘기에 잊지 못할 그림으로 남아 나를 화가로 만든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중학생 때 마신 술이 진짜 술 같다. 순수한 음주 행위랄까. 길에서 자고, 그래도 안 무섭고, 세상이 다 아름답고, 취한 내가 벼슬한 것 같고….”
그 뒤로 세상을 알고 세상과 엮이면서 술의 순도, 아니 술 취함의 순도가 낮아져갔다. 20대엔 술 취하면 사고를 많이 쳤고, 마치 신파 영화가 한 번은 꼭 눈물을 짜듯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뭔가를 하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1980년대엔 다들 그런 술 문화 속에 있었을 거다. 배영환은 그걸 ‘자폭적 낭만주의’라고 불렀다. ‘학교와 군대의 폭력적 문화 속에서 안 겪어도 될 걸 겪으면서 그걸 견디기 위한 자기 비하 또는 희화화’라는 것이다. 어떻든 변화는 불가피한 것. “제대하고 나니까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는 게 갑자기 무서워지더라고요. 술 먹고 그림 그려서 좋게 나온 게 하나도 없었고. 미술은 대단히 이성적인 거구나….”
내가 배영환을 만난 게 1994년 일간지의 미술 담당 기자를 할 때였다. 배영환은 초짜 작가였는데, 술로 치면 ‘자폭적 낭만주의’의 시대를 막 지났거나 그 끝자락에 있었던 것 같다. 열혈청년 같긴 했지만 나는 그가 술 마시고 사고치는 걸 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술자리에서 유머와 말재간이 늘어만 갔다. 재주도 많아 영화 의 시나리오를 쓰고 미술감독도 했다. 그만의 속앓이야 있겠지만, 조만간 개인전을 열고 그 뒤엔 다시 영화를 하겠다는 배영환은 여전히 의욕적으로 40대를 지내고 있다.
그가 들려준, 술 마시고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대학 시절에, 술 취하면 사고를 치니까 스스로 흥분된다 싶으면 그냥 자리를 일어서서 집에 오곤 했거든. 걸어오다 보니까 다리가 너무 아픈 거야. 옆에 자전거가 있기에 ‘내일 꼭 돌려준다’ 마음먹고 그걸 타고 집에 왔어요. 다음날 일어나니까 어디서 타고 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그런데도 술 취해 걷다가 자전거 있으면 타고 오는 게 버릇이 되는 거야.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니까 짐자전거가 있더라고요. 짐칸에 음료수 박스도 실려 있고. 이건 완전히 생계형 자전거잖아. 그걸 타고 홍대 일대를 하루 종일 다녔지. 주인 찾아주려고. 결국 실패했는데, 이걸 꼭 써야 해? 쓰지 말지?”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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