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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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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는 어제가 내일



비판하되 주류 정서를 수용하는 소박한 성정이기에,
살 좀 찌고 주름 생긴 것 외엔 달라지지 않는 최형두
등록 2010-04-30 20:29 수정 2020-05-03 04:26
최형두.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최형두.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20대에 40대의 자신의 모습을 예상해본 적이 있는지. 1980년대 초반 내가 대학 다닐 땐, 20~30년 뒤에 나나 내 친구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독재 정권과는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았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당위감에 눌려 있었고, 그러니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나 있을지부터 감이 안 잡혔다. 우리보다 20년 전에 대학 다녔던 세대가 20년 지나 갖는 소회를,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시에서 엿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시는, 대학 땐 무언가를 위해 살 거라고 믿었고 열띤 토론과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그런 친구들이 한참 지나 만나보니 모두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돼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중년의 건강을 걱정하고 잠깐씩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스쳐 지나보내고…, 그렇게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더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나 내 친구들도 한참 지나면 저렇게 될까?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역사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고, 그 역사가 범상한 중년을 허락해줄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어떠냐고? 범상한 중년이 된 건 맞지만 글쎄, 앞의 시에 담긴 자조나 회한이 나나 내 또래에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자조와 자학, 회한의 정서가, 이제는 사라져버린 80년대의 추억 아닌가. 새삼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지금 쓰는 최형두(48·문화일보〈AM7〉편집장)라는 이가 내 기억 속의 대학 시절에서 하나의 전형 같은 또렷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때, 서울대에서 데모가 크게 벌어진 날이었다. 시위대 앞에서 돌을 잔뜩 들고 나눠주던 학생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눈썹에 눈매가 진지했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이 겸손하고 부드러웠고 성정이 좋아 보였다. 그와 같은 대열에 있다는 데서 어떤 자부심 같은 게 생기기까지 했다. ‘이런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거다. 진지하고 착한 이들이.’

이후 그가 최형두라는 걸 알았고, 4학년 때 총학생회를 부활시킬 때 그와 함께 일을 했다. 운동권에서 총학생회장 후보를 두 명 냈고, 그중 하나가 최형두였다. 하지만 운동권에서 당선시키려고 했던 이는 최형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들러리였지만, 그래도 선거는 선거였다. 학생들이 최형두를 많이 찍으면 그가 당선되는 건 두말할 나위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교내에 붙여놓은 최형두의 사진이 박힌 선거 포스터가 자꾸 사라졌다. 그의 인물이 좋아서 여학생들이 떼어간다는 게 유력한 분석이었다.

이쯤 되면 당선되고픈 욕심이 생길 법한데, 최형두는 운동권 내부의 암묵적 합의를 중시했다. 선거 유세를 그리 폼나게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선거 실무를 관장하는 일을 했는데, 하루는 최형두와 최형두의 러닝메이트(부학생회장 후보), 둘과 술을 마셨다. 러닝메이트였던 이가(그는 뒤에 국회의원이 됐다) 최형두를 질타했다. ‘왜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냐. 아무리 들러리라고 해도 대중 앞에 어떻게 보이냐는 건 중요한 문제다. 나까지 바보처럼 보이는 건 싫다….’ 대충 그런 취지였다. 최형두는 ‘어, 그래? 알았다, 미안하다…’ 하는 식으로 어눌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최형두가 또 한 번 마음에 들었다. ‘욕심까지는 몰라도 야심은 없구나. 옆에 있는 이는 답답할 수 있겠지만, 소박한 친구구나.’ 최형두는 스스로 원한 대로 낙선했고, 뒤에 민정당사 점거농성으로 도망 다니다가 잡혀 감옥생활을 했다.

노태우 정부 들어, 그도 나도 멀쩡한 사회인이 됐다. 나는 기자가 됐고, 그는 시사 월간지 기자를 거쳐 에 들어갔다. 김영삼 정부 때는 둘이 함께 법조를 출입했다. 함께 취재 다니고, 취재원과 술 마실 때도 어지간하면 같이 갔다. 최형두는 잘 웃고, 사람 잘 사귀고, 남들을 잘 인정해줬다. 남 욕하거나 세상을 냉소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와 함께 다니면 좋은 기운을 받는 듯했다. 그가 노조위원장이었을 땐, 사내 쟁점이 격화돼 노조와 경영진이 첨예하게 맞섰다. 그는 파업 없이 해결하기 위해 혼자 보름 넘게 단식을 했다. 그다운 방식이었다.

최형두의 남다른 점 하나. 그는 불의와 독재에 대한 이성적 비판 정신은 있어도, 주류 사회와 주류적 가치관에 대한 생리적 저항감 같은 건 없는 듯했다. 몇 해 전 그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가 있을 때, 워싱턴에 놀러갔다. 워싱턴 관광안내를 해줄 때 그에게선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존경심이 흘러나왔다. 가끔씩 그가 보수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난 그게 대학 시절부터 그가 보였던 소박한 성정과 맞닿아 있는 거라고 생각된다. 그는 싸움닭과는 거리가 먼 평화주의자였던 거다. 얼마 전 그를 만나, 앞의 시처럼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중년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잠시 속으로 대학 시절 돌을 나눠주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살이 좀 찌고 주름이 생긴 것 빼고 그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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