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결혼 못(안) 한 내가 남의 결혼식 사회를 본 일이 두 번 있다. 그중 하나가 허문영의 결혼식이었는데, 하객을 웃겨줄 요량으로 허문영의 과거 일화 하나를 들려주려고 멘트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식장에선 차마 그 일화를 말하지 못했다. 너무 하드코어였다고 할까.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르기 힘든 영화평론가 허문영에 관한 이야기다. 그와 나는 대학 동기인데 나는 대학 때도, 그가 결혼한 뒤에도, 지금도 허문영에게서 자취생의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 무슨 냄새가 나는 건 물론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림질이 필요 없는 면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다녀서일까. 검소함이나 궁상맞음 같은 느낌도 조금 보태져서 여하튼 허문영은 손자를 보고 할아버지가 돼도 자취생 같은 인상을 풍길 것 같다. 아무래도 앞에 말하려던 일화와 관련이 큰 듯하다.
대학 때 허문영이 한 말이다. “팬티를 빨아 입는 게 참 귀찮은 일이잖아. 그럴 때 여자 팬티를 사는 거야. 그걸 일주일은 그냥 입고, 일주일은 돌려 입고, 여자 팬티는 앞뒤가 없잖아. 또 일주일은 뒤집어서 돌려 입고, 그냥 뒤집는 게 아니라 뒤집어서 돌리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또 일주일은 돌려 입고. 그 뒤엔 그냥 버리는 거지.” 허문영은 “내가 그런다는 게 아니라”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허문영은 여자 팬티 돌려 입는 남자가 됐다. (그의 결혼식 때 내가 준비했던 멘트는 “이제 더 이상 신랑은 팬티 돌려 입지 않겠죠?”였다.)
허문영도 운동권 동아리에 있었는데, 그 동아리에 속해 있던 시골 출신 학생들에게 그의 자취방은 주인 없이도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아지트였다. 아무리 사람 좋던 허문영도 밤에 집에 갔는데 개판으로 어지럽혀져 있으면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그럴 땐 이불을 한쪽 벽으로 똘똘 말아. 그런 다음에 똘똘 만 이불을 반대쪽 벽까지 밀어붙이는 거야. 그러면 방이 좀 견딜 만해진다.”
허문영은 부산 ㄷ고등학교 출신인데, 내가 아는 이 학교 출신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었다(전에 쓴 박덕건도 이 학교 출신이다). 허문영이 군대를 카투사로 가려고 시험을 보기로 했다. 시험장에 주민등록증을 지참하고 가야 하는데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한참 전에 인천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값이 없어서 그걸 잡혔던 것이다. 부랴부랴 찾아가보니 술집이 문 닫고 사라졌다. 어쨌건 그는 카투사를 갔고, 제대 뒤 에 들어갔다.
그 무렵 허문영은 잠시 동안 훗날 소설가가 된 한 여자와 노래 가사처럼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모양이다. 이 여자가 쓴 소설 중에 허문영과 똑같은 인물이 하나 등장했다고 한다. 그 소설이 나왔을 땐 아마도 둘이 ‘우정보다 먼’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갑자기 남의 소설 안에 들어앉은 자신을 보는 게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닐 거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허문영을 닮은 이 작중 인물을 두고, 저명한 한 문학평론가가 ‘이렇게 멍청한 캐릭터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며 비판까지 했단다. 난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리얼리즘 작가구나. 허문영을 무척 잘 묘사했구나.’
허문영은 언제부턴가 영화 공부를 했다. 그 언론사에 그런 팀이 있었다. 시네마테크 필름포럼을 운영하는 임재철, 영화기자를 했던 이영기, 영화와 미술에 관해 글을 쓰는 한창호 등이 허문영과 함께 영화 공부를 했던 이들이다. 이 창간되고 몇 년 지나 허문영은 이 잡지 취재팀장으로 왔다. 그의 이직은 내 인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나도 몇 년 뒤 의 영화담당 기자가 됐고, 2002년 허문영이 편집장이 됐을 때 취재팀장으로 1년 동안 파견을 갔다.
사람이 참 잘 안 변하지만, 가끔씩 조금은 변하는 모양이다. 에 가서 보니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던 그가 눈에 핏대를 세워가며 후배들에게 고함치고 닦달했다. 우유부단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과단성이 생겼다. (그가 고함을 지를수록 잡지가 좋아진 건 사실이다.) 전에는 둘이 있을 때 여자 만난 얘기(별 특별한 건 없었지만)까지 포함해 개인적인 일들을 다 말하더니 언제부턴가 과묵해졌다. 이 글에서 ‘허문영스러운’ 일화를 더 이상 들려주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표가 잘 안 나서 그렇지 전부터 그에겐 지사에 가까운 진지함이 있었다. 사소한 느낌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명징하게 분석해내는 그의 글이, 그의 진지함을 증명하지 않는가. 을 그만두고 몇 년 전부터 허문영은 눈에 힘이 풀리고 바보처럼 ‘헤’ 웃는 표정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말수는 적어진 그대로다. 또 요즘엔 자주 보지 않아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면 어떤가. 시인 김정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글 잘 쓰는 놈은 뭐든 용서가 돼.”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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