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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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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 배우 같지 않아서 배우 같은 배우



배우의 언어나 울타리 뒤로 숨지 않는 대스타…
한국 영화 다양성과 건강함의 지표였던 그가 술과 작품을 끊었다니
등록 2010-06-03 16:15 수정 2020-05-03 04:26
영화배우 문소리(36).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영화배우 문소리(36).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술을 끊었다고 했다. 잘 가는 술집에서 마주친 게 열흘쯤 전이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그날 이후로 안 마신다고 했다. ‘겨우 열흘 갖고 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가지려 한다는 것이었다. 작품 활동도 당분간은 쉬엄쉬엄 할 거라고 했다. 하필 ‘내가 만난 술꾼’이라고 쓰려는데 술을 끊다니, 쩝…. 그럼 어떤가. 영영 끊는 것도 아닐 거고.

영화배우 문소리(36)는 술을 즐긴다, 아니, 즐겼다. 주량도 어지간하며 무엇보다 술 마시는 매너가 좋다. 그와 술 마신 일이 그리 많지 않지만, 나도 술꾼으로서 다른 술꾼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있는 편이다. 몇 번의 술자리에서 장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는 알려질 만큼 알려진 대스타임에도, 공주병이 없었다. 술자리에서 화제가 자기에게 집중되기 바라거나,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삐치거나, 그래서 그렇게 되도록 뭔가를 도모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다른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대화에 끼어들고, 그런 뒤엔 말도 재밌게 잘한다. 그와 친한 한 친구는 그의 술 매너를 두고 ‘우아 떨지 않고 망가지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배우와 술 마실 때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마시기가 쉽지 않다. 그 배우가 왕자병·공주병이 전혀 없다 해도 대화에서 다른 벽이 생기기 쉽다. 내가 배우들을 만난 게 영화기자를 할 때여서 그들이 말조심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배우들은 상당수가 어떤 영화의 완성도나 감독의 연출, 다른 배우의 연기 등에 대해 자기 주관을 분명히 피력하기를 피했다. 겸손하게 보이려 그러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런 대화가 서로 거리감을 줄이거나 대화를 깊이 하는 데 장애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문소리는 달랐다. 자기 느낌을 선명하게 말했고, 그 말에 조리가 있었다. 다른 영화인에 대한 뒷담화 같은 것도, 당사자가 들어도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 같은 범위 안에서 곧잘 한다. 그런 식으로 술친구들과 거리를 좁힌다. 그에게선 배우의 언어나 배우라는 울타리 뒤로 숨으려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문소리는 처음 볼 때부터 보통 배우들과 달랐다. 2003년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하러 만났다. 허름한 티셔츠에 추리닝을 입고, 동네 마을을 나온 듯 나타나선 “(밥) 먹이고 말 시킬 때와, 안 먹이고 말 시킬 때가 다를” 거라며 식당 가서 밥 먹으며 인터뷰하자고 했다.

문소리가 대학 시절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말을 누구에게선가 들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난 그가 기자에 대해 좀더 친숙하게 느낄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더 친숙감을 느낀 건 나인 듯했다. 영리하고 소탈하고…, 대학교 동아리 후배를 만난 것 같았다고 할까. 나는 생활 반경이나 관심 분야가 비슷한 이를 만나면, 나와 같은 부류로 쉽게 단정하고 그를 잘 아는 것처럼 대하는 습관이 있는데 문소리도 비슷한 데가 있는 모양이다. 그가 결혼한 다음해, 2007년 서울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오래도록 잘 알고 지내온 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그도 비슷한 듯했다(나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그때 문소리는 1974년 호랑이띠 동갑 여자들과 차수를 옮겨 술 마시러 가고 있었다. 프로듀서, 영화기획자,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인데 내가 아는 이도 있었다. 그때 합석해 밤새 마신 뒤로 또 우연히 몇 차례 더 술자리를 함께한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배우는 보통 배우들과 어울리는데, 문소리는 배우 친구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여배우는 결혼도 주로 남자 배우와 하는 데 반해 문소리는 영화감독과 결혼했다). 그는 자기 또래의 영화 스태프와 자주 술을 마시며, 얼마 전에도 그들과 섬진강 일대를 놀러갔다 왔다고 했다.

“박희순은 남편이랑 친해서도 함께 마시고, 강호 오빠 가끔씩 만나 마시고…, 저번에 단편영화 하나 같이 한 박해일과도 가끔 보고…, 아 참, 도연이 언니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연락 와서 마시자 하고….” 배우 경력 10년이 넘었는데, 다른 배우와의 교류가 적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스타일도 다른 배우와 다르다. 확실히 독특한 배우다. 수년 전부터 문소리는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건강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말이 있었다. 연기 잘하고,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그가 활발하게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한국 영화가 건강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거란 얘기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는 활동이 뜸해졌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거라고 한다. 그럼 한국 영화가 건강하지 못해진…? 글쎄, 아이를 가지려 한다니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다만 한 가지, 그의 최근작 를 보면서도 느낀 생각이다. 배우 같지 않은 문소리는, 달리 말하면 가장 배우 같은 배우일 거라고.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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