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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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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토론쟁이, 내 늙은 친구


정치할 것 같은 노련함을 정치인 토론시키는 데 쓰는 <생방송 심야토론> 전 진행자 정관용
등록 2010-02-09 17:01 수정 2020-05-03 04:25
정관용.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정관용.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1980년대 초반 대학 운동권 동아리엔 일종의 역차별적인 문화가 있었다. ‘시골’(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출신 학생들보다 서울 출신 학생들이 무시당했다고 할까.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 대 ‘시골’의 문화적 차이가 쟁점으로 부각될 때마다 항상 시골 쪽이 헤게모니를 잡았다. 약자 편에서 운동하겠다는 이들에게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운동권 동아리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서울내기들은 요즘 말로 ‘길티 플레저’를 찾듯, 자기들끼리 은밀하게 서울 문화를 나누곤 했다.

서울 출신인 나 역시 운동권 동아리 안에서 외로움이 있었다. 왜 그렇게 시골놈들이 많던지, 그것도 남자놈들이! 내 동아리 1년 후배 중에 서울내기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얼굴도 예뻤다. 동지감이 절로 생겼다. 동지감뿐이겠냐만, 당시엔 같은 동아리 안의 남녀 교제를 근친상간 보듯 하는 구습이 있었고 나도 사귀던 사람이 있고 해서 그저 친누이처럼 아꼈다. 그랬는데 이 후배가 어느 날 남자를 사귄다고 했다. 그 남자가 내 친구라고 했다. ‘설마 그놈? 나보다 더 (뺀질뺀질하다는 나쁜 의미로) 서울내기 같은 서울내기인 그놈?’ 맞다고 했다. ‘너도 서울내기의 외로움이 컸나 보구나. 그런데 하필이면….’ 어쩌겠나. 그래도 내 친구인데 나쁘게 말할 수도 없고, 또 후배 여자가 좋다는데. 결국 둘은 결혼했다.

그 남자가 정관용(48)이다. 얼마 전까지 한국방송 텔레비전 의 진행자로 이름을 날렸던 그 인물이다. 내가 정관용과 친구라고 하니까 후배들이 그랬다. “그분이 선배 친구예요? 와, 선배는 되게 안 늙었다.” 그 말이 듣기 좋아서 지금도 내가 그와 친구라고 떠들고 다닌다.

정관용은 내 대학 동기이고, 당시에 집이 가까워서 1학년 때부터 동네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2차로 그의 집에 가서 한잔 더 하고 잔 날도 많았다. 식구가 많던 그의 집엔 대추술, 더덕주 등 집에서 담근 술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은 서울 북서쪽 끝인 은평구 구산동으로, 관악구 신림동의 서울대와는 정반대쪽이었다. 대학엔 사복 경찰들이 상주해 있었고 데모가 일면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신림동 일대는 전운이 감돌았던 반면, 은평구는 평화로웠다. 정관용과 나는 마치 군대에서 휴가 나온 기분으로 은평구의 평화를 즐기며 술을 마셨고, 어릴 때부터 남의 귓불을 만지는 버릇이 있던 나는 그의 귓불을 잡고 자곤 했다. 길티 플레저!

정관용은 대학 때 연극반을 했고 사회대 학생회장도 지냈지만 열혈 운동권까지는 아니었다. 급진적이기보다 실용적·합리적인 사고가 강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졸업 뒤 진보적인 학술단체를 이끌었다. 거기서 발을 넓히더니 김영삼 정부 초기에 청와대 행정관으로 들어갔다. 붙임성이 좋아 열 살 넘게 차이나는 선배들과도 친구처럼 말하곤 했다. 머리 좋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빨리 읽어내는 눈이 있었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도 항상 비중 있는 자리에 들어갔다. 그래서 난 정관용이 정치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판을 썩 좋게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난 그가 거기에 어울릴 것 같았고 잘할 것 같았다.

그는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지만 말이 많고 잔정도 많은 친구다. 술자리에서 과묵한 스타일은 전혀 아니고, 사람을 쉽게 사귀거나 사귀려 하고, 썩 잘 부르지 않는 노래를 열심히 여러 곡 부른다. 민폐 수준까지는 아니지만(종종 민폐 직전까지는 간다), 최근에도 들어보니 음색은 많이 좋아졌는데 박자가….

둘 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일로써 서로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한 번씩 있었다. 그가 청와대에 있을 때, 기자이던 내가 출입하던 부처의 간부들에 대한 정보를 전해달라고 해서 내가 거절했다. 한참 뒤 내가 신문사 문화부장일 때, 시사 토론의 뒷얘기를 신문에 연재해달라고 했더니 그가 거절했다. 일로 만나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다른 곳에 줄 수 없다는 나나, 공개할 수 없다는 그나 다 같은 말이었다. 공사 구별을 한 것이고 그걸로 의가 상하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내 생각과 달리, 정계로 가는 대신 방송인이 됐다. 그가 “정치 안 한다”고 할 때 반신반의했는데 시사 토론 진행하는 걸 보면서 믿게 됐다. 솔직히 시사 토론 프로에 나오는 이들 중에 토론할 자세와 능력을 갖춘 이가 반이나 되나. 정략적 계산과 기싸움이 난무하는 아사리판에서, 그는 조금이라도 유익한 말과 결과를 끌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 일에 애정과 확신이 있구나! 그래서 갈수록 노련해지는구나!

앞에도 말했지만, 정관용이야말로 온건·실용주의에 가까운데 청와대에 있을 때 보수 언론의 일방적 사상 검증에 시달렸고, 새 정부 들어서고 한국방송 사장 바뀐 뒤엔 방송에서도 잘렸다. 하지만 남들이 걱정해줄 겨를도 없이 그는 교수(한림 국제대학원대학교)가 돼 토론 문화에 대해 강의하고 연구하겠단다. 여전히 발이 빠르다. 다시 방송도 할 거란다. 최근엔 영화배우 하고 싶다고, 진짜라고, 주접을 떨고 다닌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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