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에 썼던 염기정의 카페 ‘소설’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빠지지 않고 들르는 이가 꽤 많다. 어쩌다 운때가 맞으면 한동안 단골끼리 가는 날마다 마주치기도 한다. 오래된 단골들이야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지만, ‘넌 만날 술만 먹냐?’는 남의 비아냥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소설에서 여러 번 마주치면 선제공격을 날리곤 한다. ‘넌 여기서 사냐?’ 하는 식으로. 그 표현을 빌린다면 소설에서 ‘사는’ 이가 꽤 많은 건데, 거주자의 경지를 넘어 소설의 ‘인테리어’로 불리는 이가 한 명 있다.
인테리어? 하도 자주 와서 가구가 되다시피 했다는 말인데,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단골들은 ‘이동식 가구’인 반면 이 사람은 ‘붙박이 가구’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가 소설에 자주 와서만은 아닐 거다. 보통 사람들은 술집에 올 때 왁자지껄 들떠서 오거나, 심각해져서 오거나, 최소한 약간은 ‘센티’해져서 온다. 반면 그는 마치 칸트가 매일 똑같은 시간에 학교와 집을 오갔던 것처럼, 기계적인 일과를 치르듯 소설에 온다. 들어올 때 표정이 더없이 무심하다. 오면 항상 카운터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는다.
더러 혼자 앉아 있어도 그는 크게 무료해 보이지 않는다. 아는 이가 나타나 함께 마시게 되면 함께하고, 아니면 혼자 마시다가 간다. 진짜로 가구에 비유한다 치면, 딱히 현대적이지도 고전적이기도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기능성 가구 같다. 그래서 평소엔 존재감이 크지 않지만 그게 어느덧 눈에 익어서, 어느 날 사라지고 나면 갑자기 그 자리가 텅 비어 보이는 그런 유형이랄까.
그의 이름은 이준동(53)이고, 영화사 ‘나우필름’의 대표이다. 등을 제작했고,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이런저런 의미 있는 일들을 많이 한다. 내가 가족 중에 유명한 이가 있어서 아는데, 엄연히 독립된 한 개인을 두고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 ‘누구의 남편’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안 할 수 없는 게(그는 영화감독 이창동의 동생이다), 누구든 그와 1분만 얘기하면 그의 형제 관계를 눈치채게 된다. 내가 그랬다. 7~8년 전 촬영장에 취재 가서 그와 몇 마디 나누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말투가 어찌나 똑같던지.
그는 이창동 감독보다 체구가 작고 인상이 부드럽다. 경상도 남자가 아니랄까봐 불필요한 말을 잘 안 하지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단상들을 조곤조곤 합리적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바로 동질감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생각과 고민들을, 나보다 5년 앞서서(그는 나보다 5살 많다) 해온 사람이겠구나. 이후 몇 번 만나면서 그는 내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가까운 형처럼 돼버렸다.
이준동은 주량이 약하다. 특히 독주에 약해서 주로 맥주를 마신다. 주량이 약하면 아무래도 함께할 때 술맛이 덜해지는데, 그는 그렇지가 않다. 술 흥을 돋우는 그 고유의 추임새가 있다. 맥주잔을 내밀면서 “들이대라!”고 외치고, 곧잘 노래도 부른다. 레퍼토리는 매번 똑같은 트로트곡 두세 개고 어쩌다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도 그의 입에 들어가면 트로트가 된다. 나미의 을 부를 땐, 쌍시옷 발음 잘 안 되는 경상도 출신이 입에 힘을 줘가며 ‘그 시절에’를 ‘그 씨절에’로 부른다. “그 부분을 강조하는 게(시절→씨절) 맛이 있지 않냐?”
이준동을 보면 옛날 선비가 현대의 카페에 나와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사안에 대해 열 올리는 것도 그렇다. 스스로는 왕년에 제법 놀았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고, 여하튼 그에게서 우러나오는 일종의 시대착오성, 시골스러움 같은 것들이, 차분하고 약간은 여성적이기까지 한 그의 일면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가끔 그가 술 취해 업 되면 사고가 난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자기 혼자 다친다. 춤춘다고 카운터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갈비뼈가 부러지고, 술 마시고 집에 가다 후진하는 차에 치여 어깨뼈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붙박이 가구’가 움직이니 위험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 소설이 서울 인사동에서 가회동으로 이사했는데, 이사하기 전 마지막 날에도 이준동은 소설에 갔단다. 인사동에 오픈할 때 돼지머리에 돈 꽂은 게 기억나는데, 마지막 날에도 와 있는 자신을 보며 “나는 뭐지?” 하는 반성이 생겨 가회동 소설이 오픈하는 날에는 가지 말자고 다짐했단다. 며칠 지나 개업일이 지났으려니 하고 갔더니 아직 오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 염기정은 이준동을 첫 손님으로 받았다. ‘인테리어’답게 그는 또 첫 손님이 되고 말았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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