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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곳 아닌 사는 곳으로


술장사 안 했으면 어지간히 술 마셨을 인사, 인사동에서 20년째 포장마차 하는 털보 변흥식
등록 2010-03-19 10:26 수정 2020-05-03 04:26
변흥식.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변흥식.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내가 그 포장마차에 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더라? 6~7년은 된 것 같은데…. 아! 포장마차 주인 ‘털보’가 어느 날 갑자기 젊고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포장마차에 함께 나와 일했던 게 생각났다. 털보보다 12살 어린 띠동갑이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털보의 얼굴이 확 피었다. 얼마 전 털보에게 물었다. 형(털보는 나보다 4살 많다)이 결혼한 게 언제냐고. 1998년이라고 했다. 그럼 최소한 12년 전부터 갔다? 다시 물었다. 그럼 형이 서울 인사동 사거리 옆에서 포장마차를 하기 시작한 게 언제냐고. 1991년부터라고 했다. 헉!

내가 인사동에서 본격적으로 술 마시기 시작한 게 1994년 미술 담당 기자를 하면서였다. 당연히 그때 ‘털보네’에 갔을 거다. 돌이켜보니 큐레이터 누구, 화가 누구와 포장마차에서 술 마신 기억이 난다. 16년이 넘었다는 얘긴데 기억 속 시간과 왜 그렇게 차이가 날까. 포장마차가 낮에는 없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가건물(건물? 시설?)이어서일까. 아니, 술이 취한 상태에서 2·3차로 가는 곳이어서 유념해 기억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털보네 포장마차가 20년이 됐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 길로 들어가 인사동 사거리를 조금 지나면 오른쪽에 털보네 포장마차가 (밤에만, 일요일 빼고) 있다. 머리가 벗겨지고 수염을 잔뜩 기른 사람 좋게 생긴 털보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터를 넓게 잡아서 자리가 널찍하다. 해산물이 싱싱하고, 여느 포장마차처럼 양념이 심하게 맵거나 짜지가 않다. 무엇보다 주인을 잘 아니 안심하고 먹게 된다. 언제 이 집에 들르게 되면 라면을 한번 먹어보시라. 각종 해산물을 넣고 매큼하게 끓여주는데, 속이 확 풀린다.

‘털보’의 본명은 변흥식(52)이다. 서울 창천동에서 자란 신촌 토박이인데, 인사동 포장마차를 시작한 뒤부터 줄곧 익선동·계동 등지에 살면서 인사동 토박이가 됐다. 내가 3년 전 이사하려고 계동 쪽에 집을 알아보러 갔다가 우연히 털보를 만났다. 아닌 게 아니라, 동네 부동산 정보에도 빠삭했다. 가회동·계동 일대를 털보와 함께 걸으면 털보는 동네 아줌마·할아버지들과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큰 덩치와 대조적으로 사람을 만나면 살갑게 말을 건네는 그는, 술장사만 안 했다면 어지간히 술을 마셨을 거다.

전에는 자기 포장마차에서도 손님이 빠지고 한산해지면 같이 한잔 하고 했는데, 결혼한 뒤엔 부인 눈치를 보며 자제한다. 털보는 인상처럼 기분파이기도 한데, 야무진 성격의 부인을 참 잘 만났다. 주변에 보면 딱히 결혼을 잘 못했다 싶은 사람도 드물지만, 그렇다고 결혼 참 잘했다 싶은 사람도 적은데 털보가 딱 그렇다. 늦은 밤 포장마차를 밀면서 부인과 함께 퇴근하는 모습을 보고, 그때 비로소 나는 인사동 일대를 사람들 오가는 곳이 아닌, 사람 사는 동네로 여기게 됐다.

털보는 20대에 기아자동차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강남구 신사동에서 카센터를 했다. 돈을 제법 벌었는데 경리직원이 돈을 들고 달아나면서 부도가 났다. 부정수표단속법에 걸려 도망도 다니고 막일도 하다가 1991년부터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 매출이 4만원이었는데, 6개월을 하루도 쉬지 않고 하니까 단골이 생기면서 매출이 10배 넘게 뛰었단다. 주방 아줌마를 둘 만큼 잘나가다가 집 사려 큰돈을 모은다고 주식에 투자해 또 날리고, 그러면서 포장마차 경력 20년이 됐다. 그사이 정부의 단속이 심할 땐, 노점상연합회 지부장을 맡아 구청 마당에 드러누우며 ‘생존권 투쟁’에도 나섰다.

술집 손님, 특히 포장마차 손님이야 2·3차로 들렀다 가면서 나처럼 16년 단골 기간을 6년으로 기억할 만큼 무심하지만, 주인은 어떨까. 털보는 인사동 술 문화가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전후로 확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전에는 젊은이·연인들이 많이 와선 석화 한 접시에 소주 3병씩 마시면서 밤을 새우곤 했는데, 구제금융 이후로 30~40대층으로 싹 바뀌었다고 한다. 그 뒤로 또 달라져서 6~7년 전부터는 인사동에 술손님 자체가 줄었단다. “우리 때는 비 오면 빗소리를 들으며 술 마시고, 추운 날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주잔을 기울였잖아. 요새는 안 그래. 비 오거나 날씨가 추우면 손님이 싹 끊겨.”

살아보면 술집도 나이가 들고, 동네도 나이가 든다. 술집 주인이 나이 드는 만큼 손님도 나이 들고, 인근 술집·밥집도 함께 나이가 든다. 나이 드는 걸 감추려고 보톡스를 맞듯 인사동 길은 여차하면 공사를 하는데, 다음달부터 또 인사동 사거리 일대에 보도블록 공사를 시작한단다. 공사를 밤에 하니, 털보는 걱정이다. “가까운 데로 옮겨서 해야겠지. 장사를 쉴 수 있나.”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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