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영화배우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따금씩 만나 술 한잔 한다. 배우가 친구로 있다는 게 든든하게 느껴진다. 판검사, 의사 친구보다도 더 그렇다. 이상한 일이다. 남들도 그럴까. 그럴 수 있을 거다. 요즘처럼 연예계가 세간의 관심과 부러움을 사는 마당에, 거기에 친구 하나 있다는 건 충분히 자랑거리가 될 만하지 않나. 그 친구가 누구냐면, 1천만 명 넘게 관람한 영화 의 주연이었고, 최근 드라마 에도 출연하는 정진영(46)이다. 얼마 전엔 이 친구 덕에 한효주도 봤다. 역시, 충분히 자랑거리가 된다.
정진영이야말로 술을 즐겁게 마시는 스타일이다. 술 몇 잔 들어가면 얼굴 표정에 ‘즐거워’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그 즐거움을 곧잘 전염시켜서 그와 함께 있으면 술을 많이 마시게 된다. 기타도 곧잘 치고, 노래도 곧잘 한다. 말수가 많지 않고, 아무리 취해도 주사가 없어서 함께 술 마시기 좋다. 술 취한 표정을 보고 그가 대단한 애주가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물어봤더니 술 마시는 횟수가 일주일에 한 번 내지 한 번 반이라고 했다.
막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특히 배역이 만만치가 않아서 신경을 몰입해야 할 때는 한 달 넘게도 술을 끊는다고 했다. 술을 한번 마시면 많이 마시고, 긴장이 확 풀어지는 스타일이어서 그렇단다. 술꾼이 술을 한 달 넘게 참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그는 별다른 후유증 없이 잘 참는다고 했다. 그래도 역시 술꾼인 것이, 시나리오를 보면 여기까지 찍고 나면 한잔해도 되겠다 싶은 신이 보인단다. 때도 그런 신이 있었다고 했다.
내가 정진영을 처음 만난 것도 술집이었다. 이 난에 자주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카페인데, 1990년대 중반부터 거기서 그를 봤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일간지 영화 담당 기자가 돼 그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술집에서 마주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정진영과는 인연이 제법 깊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서울대 다닐 때 그는 총학생회 문화부장을 했다. 그보다 2년 앞서 내가 4학년 때 같은 일을 했고, 그러다 보니 학교 때부터 그와 내가 함께 알고 지내온 이들이 꽤 많다. 하지만 그나 나나 남 얘기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함께 일을 한 적도 없어서 둘이 있으면 화제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잠깐씩 데면데면해질 때도 있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하다. 나이 들어 술자리에서 사귀게 된 친구의 매력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서로 조금씩 알고 있음에도 많이 아는 것 같고, 실제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감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이랄까.
나는 정진영을 보면 화려하게 빛나는 스타이기보다, 배우를 직업으로 삼은 보통 남자 같다. 그것도 건실한 남자. 매니저 없이 혼자 다니고, 옷도 소탈하게 입고…. 정진영쯤 되는 유명한 배우이면 함께 시내를 돌아다닐 때 다른 사람까지 긴장하기 쉬운데 그와 함께 다닐 땐 그렇지가 않다. 정진영이 점잖은 만큼, 정진영 팬들도 점잖은 모양이다. 서울 홍익대 앞을 몇 시간 돌아다녔는데, 사인해달라는 이들, 간혹 사진 함께 찍자는 이들 모두 무척 예의 바르게 부탁했고 길게 시간을 뺏지 않았다.
유명세의 부작용에 대해 한 배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처음엔 술집 옆 테이블 손님이 “아무개씨, 반갑습니다, 영화 잘 봤습니다” 하고 말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는 것이다. “아무개씨, 이리 오셔서 한 잔만 하시죠.” “아무개씨, 딱 한 잔만 하시죠.” “아무개 임마, 니가 그렇게 잘났어?” 정진영과는 그런 일이 없었다. 옆자리 손님이 그냥 눈인사를 하거나, 사인만 받아가선 평화롭게 각자 술을 마셨다. 그럴 땐 내가 문화 선진국에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20대 때 연극판에서 술값도 못 벌면서 술을 끊임없이 마셨다고 했다. “한국이 술 인심은 참 좋아!” 제 돈 내고 술 마시기 시작한 게 30대 중반 영화 에 출연한 이후였다. 그 뒤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이제는 배역이 줄어들 것을 걱정할 나이가 됐지만 그는 계속 바쁘다. 곧 속편인 이준익 감독의 에 출연하며, 그다음 작품까지도 정해졌다. 인터뷰할 때, 그가 술에 빗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20대에 연극을 할 때는 연극이 (사람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생각했고, 그 뒤에 상업영화 할 때는 영화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사색의 여유를 주는) 차와 같은 것을 하고 싶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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