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 때 내가 만든 모래 조각 자랑. 제목은 ‘인디언 언니’다. 한혜경
대한민국의 20대답게 ‘싸이질’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나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그날 갔던 장소, 음식, 만난 친구들, 산 물건들, 내 모습 따위를 부지런히 찍어 미니홈피에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 때려치웠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랑하지 않는 척하면서 내 자랑을 하기 위해 싸이질을 하는 거였어!’ 싸이월드의 별명이 ‘허세월드’이듯, 숱한 이들이 미니홈피의 사진들로 자기 자랑을 전시한다. 예를 들어 경제력(대표적으로는 외제차 앞에서 찍는 설정 샷), 외모(몸매 좋은 여자와 키 큰 남자의 미니홈피에 유독 ‘전신사진’이 많은 이유가 뭐겠는가), 남들과는 다른 취향이나 특기, 인맥, 학력, 애인의 존재 등등. 나도 그런 ‘허세 부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안 것이다. 동시에 ‘자기 자랑하는 것만큼 꼴불견인 건 없다’는, 알레르기에 가까운 편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람들이 대놓고 자기 자랑하는 곳을 보았다. 바로 디시인사이드 홈페이지의 ‘자랑거리 갤러리’. 통칭 ‘자랑갤’이다. 디시인사이드에는 카테고리별로 온갖 주제의 갤러리가 존재한다. 갤러리란 쉽게 말하자면 게시판. ‘잉여’와 ‘덕후’들의 주요 서식지다. 나 역시 고등학생 때부터 각종 갤러리를 전전하며 서식해왔다. 한 갤러리에서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나면 새로운 갤러리를 발굴하러 떠나는 유목민 생활. 요즘엔 생물 카테고리의 ‘기생충 갤러리’에 푹 빠져 살았다. 영화 을 다시 본 뒤 기생충의 습성과 생태가 궁금해 들어갔는데, 첫날엔 회충 사진만 봐도 오싹하고 왠지 뱃속에서 기생충이 스멀거리는 듯해 약국에 달려가 구충제를 사먹었지만, 지금은 사람 내장 속에서 꺼낸 기생충 무리가 피범벅을 한 혐오 사진을 봐도 아무렇지 않게 ‘음, 비빔면처럼 생겼군’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렇게 둔감해진 순간이 바로 떠나야 할 때. 그래서 갤러리 메인창을 띄우고 또 뭐 재미난 갤러리 없을까 훑어보던 중, 생활 카테고리에서 자랑갤을 발견했다. 깜짝 놀랐다. 이런 것도 있다니. 무슨 대단한 자랑이 있을까 궁금해 클릭했다.
자랑질 어디 한번 마음껏 해보렴, 하고 멍석을 제대로 깔아놓은 곳이 바로 자랑갤이다. 겸손 안 떨어도 된다. 남 눈치 볼 필요 없다. 자랑 아닌 척 포장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게시글의 제목은 거의 ‘○○○한 게 자랑’ ‘△△△해서 자랑’ 이런 식이다. 제대로 된 자랑을 위해 인증 사진은 필수다. 놀랍게도 이런 거품 뺀 순도 100%의 자랑질을 보니 아니꼽다거나 재수 없기는커녕 기분이 유쾌해졌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뿍 충전받는 기분. 세상에 이런 것도 자랑이 될 수 있구나!
광고
번데기를 갓 찢고 나온 파르스름한 매미를 본 자랑. 태풍이 뿌린 비가 지나가고 아파트 너머로 떠오른 쌍무지개를 발견했다는 자랑(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무지개란다). 맛있는 거 먹었다는 자랑. 아버지가 나 같은 자식을 위해 20년간 열심히 일하셨다는 게 뿌듯하다는 자랑. 지뢰찾기 게임 기록 세운 자랑. 나를 짝사랑해주는 이성이 있다는 자랑(그렇지만 그 사람과 사귈 마음 없는 건 안 자랑). 애인도 아닌 여자한테 샤넬 귀고리를 선물했다는 자랑(=“나 돈 많다”는 자랑). 귀여운 아내와 일출을 보고 온 자랑(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찍은 부부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축복과 부러움을 쏟아냈다). 한쪽 발에만 모기 30방 물린 것 자랑. 냉장고에 방치해둔 양파가 모조리 싹이 나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 자연의 신비를 체험 중이라는 자랑. 공중화장실에서 청소부 아주머니와 이야기하다 마음고생 심하신 것 같아 꼭 안아드렸다는, 충동적 프리허그 자랑. 자기 얼굴이 잘생겼다며 자랑(그저 그런 본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도 능력!).
자랑갤의 자랑을 보다 보니 편견은 어느새 저 멀리. 허세는 싫지만, 긍정적이고 건강한 자랑은 참 예쁘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 이렇게나 열심히 살고 있다. 너 진짜 멋지다, 정말 기특해, 칭찬하며 토닥여주고 싶은 사람들…. 별것 아닌 게 의외로 자랑거리가 될 만큼 소중한 것일지 모른다. 해수욕장에서 모래성을 쌓고 놀았던 시간, 당신과 함께 밥을 먹었던 한때, 건강한 몸 상태, 뭐 그런 것까지도. 우린 참, 자랑거리가 많다. 이렇게나.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안동 덮친 산불에 부석사 무량수전·봉정사 극락전도 ‘초비상’
[속보] 영양 4명·영덕 3명 숨진 채 발견…경북 북부 산불 사망 최소 9명
의성 천년고찰 삼킨 화마, 주왕산국립공원 넘어 영양·영덕까지
[단독] 검찰 “윤석열 2차 계엄 시도 수사 필요” 수사보고서 작성
전한길 자살 못 하게 잡은 절친 “쓰레기…잘못 말해주는 게 친구니까”
[속보] 청송 60대 여성 불에 타 숨진 채 발견…경찰 “산불 사망 추정”
‘도깨비불’ 옮겨다니며 의성 산불 확산…최대 1㎞까지 불똥
이재명, 항소심 재판부에 “윤석열 취임 뒤 표적 수사” 진술서 제출
노벨상 한강 “윤석열 파면하라”…작가 414명 이례적 공동성명
국민 속은 새까맣게 타는데…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