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땀나는 어느 저녁. 연상의 친구 L양을 꼬드겼다. “언니, 재밌는 데 안 갈래요? 강남 쪽 클럽에서 밤에만 열리는 특이한 벼룩시장인데, 클럽문화 전문 잡지에서 주최하는 거야. 어때?” 그녀는 물었다. “너 가봤어?” “아아니. 사실 나도 케이블 방송 보고 알았는걸.” “정말 재미있을까?” “응, 아마도.” 때마침 L은 색다른 자극을 갈구하던 참이었다. 일주일 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쨋주 토요일 저녁에만 열린다는 그 이상한 벼룩시장(일명 ‘블링 나이트 플리마켓’)에 간다. 중년의 택시기사는 기본요금으로도 충분한 거리를 고의적으로 빙 둘러 간다. 온갖 외제차 매장과 빌딩들을 지나쳐 드디어 도산대로 사거리에 도착한다. 요금은 7천원이 넘는다. 방배동 토박이인 L이 내리자마자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다. 우리가 “이거 너무 돌아가는데”라고 몇 마디 꿍얼거리자 택시기사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나는 L을 진정시키며 골목으로 들어간다.
쿵쿵쿵, 일렉트로닉 계열 음악의 비트가 회색 컨테이너를 쌓아올려 만든 독특한 모양의 건물에서 터져나온다. 이 건물은 사실 클럽이라기보다 복합문화공간이라고 부르는 게 알맞은 곳이다. 종종 큰 파티가 열리기도 하고. 한 귀퉁이에서 소박한 바비큐를 구워 판다. 그 곁에서 백인들 몇 명이 선 채로 맥주를 마신다. 입구 앞에선 멋 좀 부렸다 싶은 20대 남녀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들어서는데 마치 금요일 밤의 클럽 입구에서 입장료를 낼 때처럼 설렌다. 좌판은 이미 다 깔려 있다. 중앙의 홀을 중심으로 층간 복도 구석구석까지. “아, 사람 진짜 많네.” 나는 중얼거린다. 그 소리는 강렬한 음악에 파묻힌다. 한낮의 노천 벼룩시장과는 180도 다른 종류의 열기를 느낀다. 드높은 천장에서 조명이 비추고, 한편에서는 멋진 남자들이 디제잉을 해대고, 말보로 부스의 담배 파는 미녀가 리듬에 몸을 흔들고, 카메라 플래시는 여기저기서 터지고…. 벼룩시장을 꽤나 다녀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셀러’(판매자)로 참여하려면 주최 쪽 잡지의 홈페이지에 신청해야 하는데 인기가 좋아 경쟁률이 높다(사실 나도 참가 신청을 했지만 떨어졌다). 일반인뿐 아니라 신인 디자이너나 모델들까지 모여들 정도. 선정된 셀러는 주최 쪽에 품질 좋은 아이템 하나를 기증해야 한단다. 기증받은 물품은 즉석 경매에 부쳐 그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쓴다니, 참 갸륵하다.
액세서리, 옷, 신발, 가방, 그림, 공예품, 수영복, 선글라스, 모자 등 상태 좋은 물건이 많다. 남성용 구두를 축소해놓은 듯 독특한 여자 구두를 발견한다. 신어보니 원래 내 것이었던 양 딱 맞는다. “얼마에 해주실 수 있어요?”라 묻는다(“얼마예요?”라는 질문보다 효과적이다). 좌판의 주인인 내 또래 여자가 말한다. “이거 메이드 인 이탤리, 이탤리! 3만원에 가져가요.” “에이, 2만7천원에 해주세요” 하고 능글맞게 웃는다. 여자는 킥킥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먹고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재미로 참가한 초짜답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냉큼 사고, 살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얼른 팔아치운다. 그게 피차 남는 장사. L은 예쁘고 독특한 지갑, 팔찌, 원피스를 찾아내 사들인다. 나는 L의 안목을 칭찬하며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피운다.
갑자기 여자의 노랫소리가 크게 들려와 깜짝 놀란다. 공연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위층의 철제 난간에 기대 홀의 사람들과 밴드를 구경한다. 잠시 뒤 단상에서 경매가 시작된다. ‘프라임’이라는 예명의 남자 연예인이 진행자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유명한 모델 겸 디제이가 기증한 수영복이 등장한다. “화보 촬영할 때 딱 한 번 입은 수영복! 2만원부터 갑니다!” 그러나 어이쿠, 아무도 사려 들지 않는다. “저 모델 참 쑥스럽겠다.” “게다가 저거 나름 비싼 브랜드인데.” 조금 뒤에는 패션모델이 기증한 여자 윗도리가 나온다. 상당히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이다. 저걸 누가 살까 생각하는데 역시나 안 팔린다. 유명인 것이라고 덥석 사는 이는 없다. 아, 이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사람들 같으니. 마지막 물품은 선글라스다. “언니, 저 브랜드 알아?” “아니, 몰라.” “저거 과연 팔릴까?” “그러게.” 하지만 예상외로 경쟁이 치열하다. 1천원, 500원씩 야금야금 가격을 올려 외치는 두 남자 때문에 사람들은 방청객처럼 웃어댄다. 경매는 유쾌하게 끝난다. L과 나는 홀 옆의 바에서 맥주를 사들고 옥상으로 간다. 밤하늘과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며 마시니 안주가 없어도 좋다. 얼마 전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L이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아~ 젊을 때 이런 데도 많이 놀러다닐걸.” 나는 대꾸한다. “나중에 남편 데리고 놀러다니면 되지 뭐.” 클럽에서 몇 시간 신나게 춤을 추고 난 듯 만족스러운 노곤함이 찾아온다. 우리는 빌딩 사이로 지나다니는 바람에 땀을 말린다. 밤은 아직, 길다.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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