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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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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지금 당장 만나!


‘동네 친구 구합니다’ 1탄…
반지하방에 물이 찰 때 도와주고, 같이 나물도 뜯을 사람 어디 없수?
등록 2010-04-09 19:13 수정 2020-05-03 04:26
동네 친구가 있었던 때는 초등학교 시절이 유일했다. 동네 친구들과 할 수 있는 일을 헤아려보니 당장 동네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혜경

동네 친구가 있었던 때는 초등학교 시절이 유일했다. 동네 친구들과 할 수 있는 일을 헤아려보니 당장 동네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혜경

자취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혼자 술 마실 때가 종종 있다. 왜, 그런 밤 있지 않은가, 다음날 오전에 스케줄이 있든 말든 좀 취하고 싶은. 그날도 그랬다. 밤 12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맥주 충동’이 찾아왔다. ‘추리닝’ 바람으로 슈퍼에 달려가 스낵 한 봉지와 500cc 캔맥주 두 개를 사갖고 방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으로 음악을 틀어놓은 채 멍하니 홀짝댔다. 두 번째 캔을 땄을 때 마침 리쌍과 장기하의 가 흘러나왔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라는 노랫말 때문인지 누구든 불러내 같이 마시고 싶어져 휴대전화 전화번호부를 훑었다. 얘는 집이 멀어 안 되고, 쟤는 아침에 출근해야 하니까 안 되고, 걔는 술 끊었으니까 안 되고…. 결국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 동네 친구를 여럿 만들고야 말겠다고.

내 인생에서 동네 친구들이 있었던 때라고는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 유일하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애들끼리 놀이터에서 놀던 어렴풋한 기억뿐. 생각해보니 꽤 여러 해 전부터 동네 친구는 로망 중의 로망이었다. 어째 요즘엔 미혼남녀가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자취하고, 요리를 잘하며, 음주가무와 식도락을 나만큼이나 좋아하고, 부르면 흔쾌히 나오고, 우리 마을을 사랑하는,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을 갖고 싶단 말이다.

결심 이후 며칠간 ‘동네 친구가 생기면 해보고 싶은 것·할 수 있는 것’들을 카테고리별로 디테일하게 상상해보았다.

1. 장보기: 다량 구매하면 싼 생필품이나 농수산물을 함께 사서 n분의 1로 나눈다(빨리 상하는데 용량이 많아 못 사던 것도 사서 나눌 수 있다). 마트의 마감 세일 시간을 공략하기에 좋다.

2. 음주가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술이 급할 때, 동네 호프집에서 추리닝 입고 편히 만나 마신다. 또는 서로의 집에 놀러가 마실 수 있다. 노래방에 가고 싶은데 혼자 가긴 뭐하고 멀리 사는 절친 불러내긴 미안할 때, 동네 친구들을 호출한다.

3. 다양한 활동: 마을 공터에서 배드민턴 치기, 중랑천을 따라 자전거 타기, 야외취사, 나물 뜯기, 꽃놀이, 동네 뒷산 오르기, 목적 없는 산책, 동네 맛집 발굴, 자취방 파티 등등. 요가· 댄스스포츠·요리·각종 악기 ‘능력자’가 있다면 그에게서 다 같이 전수받는다.

4. 품앗이: 가구 배치를 바꿀 때, 손수 도배를 할 때, 이삿짐을 싸야 할 때, 반지하방에 물이 찼을 때, 서로의 노동력을 제공한다. 반려동물을 두고 장기간 어딜 다녀와야 하는 친구가 있으면 대신 동물을 돌봐준다. 김치, 피클, 과실주, 잼 같은 저장식품을 함께 만든다.

그럼 이젠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네 친구를 구할 수단을 꾀할 차례. 동네의 배드민턴 클럽이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해봤다. 그런데 클럽 회장인 중년 아저씨한테 들은 얘기로 판단하기에, 여긴 스포츠맨십과 근성을 갖고 배드민턴채와 한 몸이 되어야 하는 열혈단체였다. 나처럼 잿밥에만 관심 있는 저질 체력이 감히 넘볼 데가 아니었다. 단념. 다음에는 중랑천 야외에서 아침저녁 무료로 강습하는 체조 수업. 수강생 대부분이 아주머니인데다 수업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렵다는 소리를 듣고, 역시 해보기도 전에 접었다. 이번에는 싸이월드의 지역별 동네 친구 만들기 클럽에 가입했다. 같은 마을 친구를 만들기도 전에, 여자 회원이라면 일단 집적이고 보는 남자 회원 몇몇 때문에 불쾌해 탈퇴. 내 목적은 동네 친구지 이성 친구가 아니었으므로.

삼세번의 시도 끝에 이런 마음을 먹었다. 내가 직접 동네 친구 모임을 결성하자고. 남이 차려놓은 밥상이 마음에 안 들 땐 직접 차려먹어야지 어쩌겠는가. 가장 기본적인 방법, 손수 만든 유치한 전단지를 붙이는 거다. 색종이를 몇 장 꺼내 ‘동네 친구 모집’이라 적어본다. 무슨 말을 쓸까 고민하다가 웃음이 나온다. 봄비가 내린다. 저 비가 그치고 나면 담벼락에, 전봇대에, 육교 밑에, 마을 게시판에, 이 조그만 색종이 전단지를 붙여두고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것이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다음회에 계속.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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