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소개한 것처럼 동네 친구를 구한다고 일을 벌여놓고도 솔직히 연락이 얼마나 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우리 동네로 이사 온 고교 선배 K와 취중에 서울 이문동과 석관동 일대를 쏘다니며 몰래 전단지를 붙였다. 첫 전단지를 붙이려던 순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법인 것 같아서 차마 깨끗한 담벼락에 덥석 갖다 대지는 못하고, 월세와 과외와 부업 전단지가 점령한 전봇대 구석에 소심하게 붙였다. 색종이의 처연한 원색과 조잡스러운 손 글씨 때문인지 크기는 작아도 꽤나 튀었다.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함부로 내 연락처를 노출했다가 이상한 사람들이 연락해오면 어쩌지? 아니, 이런 거 보고도 연락하는 사람이 있을까? 연락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그렇지만 만들어둔 전단지 20여 장을 모두 붙였다. 가장 집중적으로 붙인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 일대. 자판기 옆, 흡연구역, 공연 게시판, 사물함 귀퉁이, 계단 옆, 그네 기둥, 엘리베이터 등 곳곳에 ‘동네 친구 구합니다’ 전단지를 깔았다. 평소 호기심이 많고 눈썰미가 쓸 만한 인간이라면 이 전단지를 그냥 넘길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다음날, 몇 통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거기 뭐하는 데예요?’ ‘동아리인가요?’라는 질문. 설마 동네 친구를 이런 식으로 구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지, ‘동네 친구’라는 이름의 동아리로 오해하는 듯한 이들에게 이렇게 답장했다. ‘어떤 의무나 사명감 없이 그냥 같은 동네 젊은이들끼리 동네 친구 하자는 소탈한 사교모임이에요^^.’
이틀째, 문자가 한 건도 없었다. 어라? 설마 고작 하루 만에 약발이 끝난 건 아니겠지.
사흘째, 드디어 문자와 전화가 폭주했다. 심지어 장난전화까지 왔다. 비록 이 동네 주민은 아니지만 가입하게 해달라는 사람이 있질 않나. “너 거기 있어? 나 여기 있어, 신이문에… 동네 친구”라는 카피의 전단지를 본 누군가는 밑도 끝도 없이 ‘너 거기 있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그래서 난 ‘응, 나 여기 있어, 신이문에. 그대는 어디에?’라고 답장했다).
나흘째부터는 꾸준히, 하루에 두세 명씩 문의를 해왔다. 심지어 심야와 새벽에도 궁금함을 못 참고 문자를 보내오는 이가 있었다. 덕분에 며칠간 잠을 설쳤지만 관심받으니 좋긴 좋았다. ‘거기 여자 많아요?ㅋㅋ’라는, 귀여운 흑심이 묻어나는 문자까지. 즐거웠다.
이윽고 어느덧 일주일째. 나를 포함해 11명의 동네 친구를 모았다. 첫 단체 문자(이른바 ‘♧동네 친구 통신♧’)를 보냈다. 화요일 저녁에 동네 호프집에서 첫 모임을 하기로 했으니 참석하라는 ‘통보’였다. 11명의 스케줄을 다 맞출 수는 없어 그리 했는데, 딱 반만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만사 다 쭉정이와 엑기스로 나뉘는 거 아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못 온다는 사람 속출. 그들과는 두 번째 모임에서 만나기를 기약할 수밖에.
그리고 바로 어젯밤, 첫 모임에 다녀왔다. 우리 동네 친구들끼리 서로 알아볼 수 있는 표지로 집에 있던 연두색 개구리 인형을 가져가 호프집 의자에 앉혀두었다. 개구리 인형을 본 낯선 이가 다가왔고, 우리는 외쳤다. 반가워요, 동네 친구. 이날 모인 사람은 5명. 모두 여자였다. 우리는 홍합탕을 곁들여 청하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미지 게임’도 했다. 동성끼리 마시는 자리에서 이미지 게임을 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나는 “여기서 나이트 가면 제일 잘 놀 것 같은 사람은?”이란 질문에 몰표를 받아 벌주를 마셨다. 대화는 자취 생활의 고됨, 이 동네 마트들의 장단점, 이 동네 맛집과 핫 플레이스 등 다분히 동네 친구다운 주제로 이어지다가 술이 계속 들어가자 역시나 불변의 취중 대화 주제 ‘연애’로 흘러갔다. 3시간가량의 술자리를 산뜻하게 정리하고 나서는 길, 남은 회비는 편의점에서 바꾼 잔돈으로 n분의 1씩 나누어 가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졌다. 나는 개구리 인형을 끌어안고 꽃샘추위 몰아치는 이문동 골목을 달렸다. 취기 때문인지, 동네 친구들이 생겼다는 기쁨 때문인지, 별로 춥지도 숨차지도 않았다.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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