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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에서 ‘홈런’에 목매시던 그분


여성이 클럽보다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나이트클럽… 속 뻔히 보이는 ‘흑심’ 남자가 좀 많긴 해
등록 2010-02-03 13:59 수정 2020-05-03 04:25
나이트에서 ‘홈런’에 목매시던 그분. 한혜경

나이트에서 ‘홈런’에 목매시던 그분. 한혜경

한참 전에 쌓인 눈이 녹지도 못할 만큼 추웠던 날. 친구 A양과 나는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겨울이 싫다, 심심해 죽겠다, 투덜거리던 중 A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내일 금요일인데 놀자.”

이 말은 쇼핑 가자는 뜻도, 맛집에 가자는 뜻도, 교외로 드라이브 가자는 뜻도 아니다. ‘토요일 아침’이 될 때까지 함께 ‘금요일 밤’를 불태우자는 뜻이다. 어디가 좋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이른바 ‘잘나가는 클럽’에 갔을 경우를 예상해본다. 줄 서서 입장하고, 줄 서서 가방 맡기고, 줄 서서 맥주 사고, 만원버스처럼 앉을 데 없고, 댄스 플로어는 콩나물시루와 불가마 사우나를 합쳐놓은 것 같고, 그런 와중에 등 뒤에서 ‘부비부비’(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의 등에 몸을 밀착하고 춤추는 행위) 하는 남자가 내 몸을 일부러 더듬고는 좁아서 어쩔 수 없이 닿은 것뿐이라는 듯 시치미 떼고 있겠지. 오, 분명 이럴 거다. 이런 것도 24살 직전까지는 참고 즐길 만했는데, 본격적인 20대 중반에 접어드니까 이젠 체력이 달려서 버겁다.

그래서 우린… 안락한 소파가 있는 ‘나이트’에 갔다. 거기, 88만원 세대지만 놀고 싶은 생명력은 넘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여자들이 있었다. 외제차 몬다, 외국계 기업 다닌다, 교포다, 공무원이다, 강남 산다…. 88만원 세대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 센 척하는 남자들 옆자리에. 나도 당신도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88만원 세대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애써 허세를 부리면서, 서로를 힐끗 바라봤고, 자꾸만 마주쳤다.

당신이 20대 싱글녀라면, 그리고 지금 ‘①여기저기 돈 쓸 데 많아서 여유는 없고 ②몸 힘든 건 싫지만 ③가끔씩 금요일 밤이면 이성과 놀고는 싶은’ 심리 상태라면, 그럴 땐 ‘그냥 클럽’보다 ‘나이트클럽’을 추천해주고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편하니까. 내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담당 웨이터가 팁도 안 줬는데 램프의 요정처럼 다 해준다. 화장실 가는 것만 셀프.

요즘 잘나간다는 서울 강남구의 어느 나이트. 웨이터 ‘장○건’에게 예약을 했다. 주말(금·토요일)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으니 예약 필수란다. 손님이 예약을 했어도 오기로 한 시간에 안 오면 자리가 남에게 넘어간다. 그건 남자와 여자 모두한테 평등하게 적용되는 룰이다.

하지만 나이트에서 남녀 평등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술값으로 지출해야 하는 최소 비용이다. 여자의 최소 비용은 평일(월·화·수·목·일요일 밤 9시 이전 입장)에 0원, 주말(금·토요일 밤 9시 이전 입장)에 4만원. 여자들이 평일에 일찍 와서 공짜로 노는 걸 나이트 용어로 ‘푸싱’이라고 한다.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오고, 남자가 와야 양주도 팔고 매상이 오르니, 물 관리 차원에서 여자들을 동원하는 시스템이다. 섹시하고 예쁠수록 담당 웨이터에게 대우받고 지속적인 관리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웨이터가 “오빠가 내일 휴일인데 저녁 먹자”라든가 “월요일이라 손님이 없는데 이따 푸싱 올 수 있어? 택시비 챙겨줄게”라고 전화하는, 그런 거다. 왠지 사양하고만 싶다.

20대 초반에 푸싱을 몇 번 해봤는데, 평일은 사람이 없어서 시시하다. ‘밤마실’은 역시 주말에 해야 제맛이다. 한 테이블당 4명까지 앉을 수 있으니까, 넷이서 나눠 내면 클럽의 주말 입장료보다 싸게 먹힌다. 결정적으로, 여자는 나이트에서 술값이 따로 안 든다(남자들이 시킨 술을 여자들이 마시니까!). 남자들은 1인당 최소 몇십만원을 써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 비싼 돈을 내고 오니까 남자들이 그렇게 ‘홈런’을 치려고 기를 쓰나 보다.

‘홈런’이 뭐냐고? 남자들끼리의 나이트 은어다. ‘원나이트 스탠드’를 의미한다. 나는 남자들만 가입할 수 있는 나이트클럽 동호회 카페에 아빠 아이디로 가입하고, 남자들이 쓴 나이트 방문 후기를 읽었다. “저 C나이트에서 홈런 쳤어요!” 같은 글을 누가 올리면 “님 축하드려요^0^” “부럽삼” “홈런 노하우 전수 좀…” “아 나도 홈런 치고 싶다ㅠㅠ”처럼, 무슨 열혈 야구소년들 같은 댓글이 달린다.

아무래도 남자들, 어느 정도는 작정하고 오는 걸까? 그래도 다들 선수는 아니니까 순수도 남아 있다. 정말 맘에 드는 여자하고는 하루뿐인 홈런이 아니라 앞으로의 소중한 ‘롱런’을 기대하는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그날 나랑 홈런 치고 싶어 끝까지 미련 못 버리던 그분께 고한다. “저 그날 딴 남자랑 나간 거 아니에요. A양이랑 김밥집에서 밥 먹고 집에 갔어요. 그쪽 속내가 뻔히 보이니까 너무 징그러워 피한 거예요.”

홈런에 연연하는 남자가 있었는가 하면, 홈런에 초연한 남자도 물론 있었다. 그 얘기는… 다음회에 계속.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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