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나는, 돈과 시간을 들여 불특정 다수의 남을 돕는 ‘착한 일’을 그다지 안 했(한)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려고 방송사의 자동응답전화(ARS) 번호를 누르거나, 아프리카 어린이 1 대 1 후원을 하려고 기꺼이 유니세프에 가입한다든가, 사랑의 연탄 나르기 봉사에 참여한다든가 뭐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는 뜻이다. 각종 핑계로 A4용지 한 장은 채울 수 있지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제 불우이웃은 바로 저란 말예요!’
그 따위의 뻔뻔스러운 심리 상태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착한 일이 딱 하나 있다. 3년 전 시내에서 누굴 기다리느라 시간을 때워야 했다. 마침 피켓을 들고 헌혈을 권유하는 아주머니에게 붙들렸다. “요즘 혈액이 너무 부족해서요”(사실 항상 그렇다)라는 아주머니의 간곡한 말씀에 차마 거절을 못하고 그대로 따라가 얼떨결에 첫 헌혈을 했다. 굵은 주삿바늘이 팔꿈치 안쪽 야들야들한 살갗에 꽂히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 이 정도면 생각보다 안 아프군. 320㎖의 피가 몸을 빠져나가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걸로 적어도 지옥행은 면했네. 그리고 기념품으로 문화상품권을 받았을 때, 휴식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들을 발견했을 때, 헌혈증이 있으면 나나 내 가족이 응급 상황에서 그만큼의 혈액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며칠 뒤 내 피 상태가 어땠는지 건강진단처럼 친절하게 알려주는 우편물을 받아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 이거 꽤 남는 장사(?)인데? 그때 이후로 쭉, 생각날 때면 가끔씩 헌혈을 한다.
그 사실을 처음 안 친지들의 반응은 “네가 헌혈을?(피식)” “그런 걸 왜 해?” “안 아프더냐?” “위험하지는 않니?” 등 다양했다. 그런데 “나도 같이 하자!”는 반응만은 없었다. 헌혈을 시작하면서 새삼 실감했다. 헌혈인(獻血人)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헌혈의 집’에 가면 현재 헌혈이 가능한 몸 상태인지 확인하는 간단한 검사를 몇 가지 거친다. 만약 헌혈 부적합 판정을 받으면 절대로 무리한 헌혈을 강행하지 않는다(당사자가 괜찮다고 아무리 우겨도!). 한번 가보지도, 해보지도 않고 애매한 공포와 편견을 가진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약 4개월 전, 헌혈하러 간 김에 ‘조혈모세포(골수) 기증’ 희망등록을 하고 왔다. 그때 기념으로 받은 파란색 쥐 모양 기념품(마우스 손목 받침대)을 책상 위에 항상 놔두고 써먹었다. 깜찍한 쥐의 등짝에는 “‘조혈모세포 기증’ 당신의 약속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문장이 흰 글씨로 찍혀 있다. 놀러온 친구가 그걸 보고 뭐냐고 캐묻기에 설명해줬더니 “위험할 텐데 왜 그런 걸 한다고 그러냐”며 화를 내는 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걱정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최근 나의 영향을 받아 헌혈인 한 명이 늘었다. 나와 예전에 사귀었지만 지금은 친구 사이가 된 사람이다. 편의상 X군이라고 하자. X군 또한 신체는 건강한데 헌혈은 그다지 하지 않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헌혈계의 VIP라 할 수 있는 등록헌혈회원이다. 그가 헌혈과 친해진 계기는 ‘헌혈의 집 데이트’였다. 나는 헌혈의 집이 있는 시내에서 X군과 데이트를 할 때면 “어라? 저기 한 번 들렀다 가지 않을래?”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헌혈의 집에 가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쾌적하고 밝은 분위기의 인테리어에다 각종 음료수가 무한 리필되지, 만화책과 잡지도 구비돼 있지, 이제 그만 가라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지, 이건 뭐 혼자 놀기도 좋고 둘이 같이 놀기에도 좋다. 오죽하면 ‘헌혈카페’라고 부르겠나. 게다가 헌혈의 집은 교통편이 용이하고 젊은이들이 많은 번화가에 주로 있어 헌혈 뒤 데이트코스가 매끄럽다.
애인의 건강 상태와 엄살 정도를 대략 체크할 수 있다는 이점까지 있다. 헌혈도 못할 정도로 혈압 상태나 철분 수치가 안 좋은 건 아닌지, 주삿바늘 꽂힐 때 잘 참는지 아니면 아프다고 오버하는지, 안 보는 척하면서 꼼꼼히 살펴보자. 회복 시간 동안 만화책을 보며 노닥거리다가 출출해지면, 철분과 단백질을 듬뿍 함유한 음식으로 영양 보충을 하러 나가자. 뿌듯한 동지애를 마음껏 느끼면서 서로 잘했다, 기특하다 토닥여주고 말이다. 헌혈은 건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한다. 그 특권, 가끔씩 좀 써먹자.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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