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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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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기 전에 다시 올게



서울에도 성곽이 있다기에 달려가 만난 서울 성곽… 아파트조차 시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여
등록 2010-09-01 17:12 수정 2020-05-03 04:26
서울성곽 가는 길에 마주친 이화동의 벽화 그려진 집. 한혜경.

서울성곽 가는 길에 마주친 이화동의 벽화 그려진 집. 한혜경.

이런 의문을 품어본 적 있는가? 언제부터 서울에 아파트가 이토록 많았을까, 하고. 도대체가 이 도시는 아파트를 짓는 것,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 아파트를 사는 것이 최선의 목표이자 미덕인 것만 같다. 우뚝 솟은 거대한 아파트단지를 볼 때면 징그럽다. 전혀 안 예쁘고 기괴해 보여서(저토록 ‘집’은 느는데 왜 ‘집 없는 사람들’도 같이 늘까, 생각해볼수록 더!). 낡고 오래된 마을을 무조건 부수고 아파트단지를 세우는 방식의 재개발이 정말 싫다. ‘디자인 서울’이라며 자꾸만 차갑게 생긴 초현대식 건물을 뚝딱 짓는 것도, 별로. 서울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고 그저 돈의 논리로 재단하는 걸로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차츰, 요즘 서울은 어느 동네를 가도 다 비슷비슷 뻔하게 생겼지 뭐, 이런 생각이 굳어져갔다.

그래서 동네 친구인 K가 얼마 전 서울 성곽에 다녀왔다고 했을 때 화들짝 놀랐다. 에에… 뭐? 성곽? 그런 게 서울에 있어? 거긴 깜빡 잊고 재개발 안 했나?(농담) K는 상경한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 어느새 서울의 숨은 명소를 줄줄 꿰고 있었다. 하긴 서울은 500년도 더 된 수도니까 옛 성곽이 남아 있을 법하다. 이런 걸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니…. 또래의 서울 토박이들에게 서울 성곽에 가본 적 있느냐고 묻자, 없단다. 한 명은 “이번 신경숙 장편 읽고 나서 가보고 싶어졌어”(주인공 남녀가 성곽에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핑크빛 장면이 있음), 또 한 친구는 진지하게 “그게 6·25 때 안 무너지고 아직 멀쩡해?”. 그런데 도시남자 그 자체인 P가 의외로 “거기 올라가면 기분 되게 좋아요”라며 웃었다. 그 말에 뭔가 조선시대다운 성곽의 비주얼을 떠올리려 애써봤다. 하지만 웅장한 만리장성의 이미지가 상상에 난입했다. 나는 진짜 옛 성곽을, 그러니까 졸병 돌쇠랑 막손이가 보초를 섰을 그 성곽을, 무엇보다 성곽 아래 있는 모습들을, 고스란히 보고 싶었다.

K와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난 날, 가느다란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우리는 성곽이 있다는 낙산공원을 향해 겹겹의 술집과 커피숍과 소극장과 식당을 지나 언덕을 부지런히 기어올랐다(마을버스 3189번을 타고 올라가도 된다). 달동네 느낌 물씬한 골목 계단, 낮고 조그만 옛집들이 나타났다. 재개발 광풍 속에 거의 멸종 직전인 모습들이었다. 골목과 계단과 집들에 드문드문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분명 미술을 전공한 프로들의 솜씨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혜화동 근처 재개발을 앞둔 어느 마을에 벽화를 그리는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이야기. 그 마을이 바로 이곳 이화동이었다. 이 풍경 또한 없어지리라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아아, 왜 꼭 지켜주고 싶은 건 사라지는 걸까?

낙산공원에 들어선 우리는 성곽이 있는 꼭대기로 어슬렁어슬렁 올라갔다. 갖은 꽃과 나무 사이로 도심이 내려다보였다. 종각역의 삼성타워와 남산의 N서울타워까지 또렷했다. 운동을 하거나 개 산책을 시키러 나온 주민들과 마주쳤다. 이윽고 성곽에 다다랐다. 잎사귀가 조그마한 담쟁이들이 장식처럼 성곽에 달라붙어 자라나고 있었다. 조르륵 이어진 성곽은 딱 아담한 높이였다. 출사 나온 몇몇 남녀가 큰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풍경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우리는 성곽을 액자 삼아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N서울타워 대신 텃밭 딸린 작은 집을 발견했다. 노부부가 그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외치려다가 참았다. 키가 껑충한 대파 옆에 쭈그리고 앉아 쉬는 할머니를 훔쳐보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니 저 멀리 아파트단지가 바글바글했다. 신기하게도 그 아파트들을 포함한 모든 풍경이 시적으로 보였다. 틀림없이 성곽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물든 탓이리라. 우리는 각종 전래동화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내려갔다. 공원을 나서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 어귀의 봉제공장에서 드르르륵, 재봉틀 기계음이 흘러나와 나지막한 빗소리와 어우러졌다. 그 소리가 왠지 이상스레 듣기 좋았다. 때마침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거기 그냥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덕을 내려온 우리는 다시 유행가와 술집과 각종 프랜차이즈 업소로 꽉 찬 서울에 녹아 들어가서 연극 포스터가 잔뜩 나붙은 식당의 밥을 사먹고 ‘커피빈’의 커피를 마신 뒤 헤어졌다. 며칠 뒤 인터넷으로 ‘이화동 재개발’을 알아보았다. 획기적이고 새로운 재개발아파트, 지반 훼손을 줄이는 친자연형 단지, 그런 말들이 나왔다. 조감도에는 그저 퍽 ‘짜리몽땅’한 아파트단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획기적인 짜리몽땅함 혹은 짜리몽땅한 친자연이랄까.

예정된 재개발로 헐리기 전에 나는 또 그곳을 거쳐 성곽에 오를 것이다. 곧 사라질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두기 위해- 그 기억을 공유하고픈 사람들의 손을 이끌고.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88만원 세대의 88한 놀이’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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