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곧 태양이 솟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 섰다.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마을의 정겨운 산과 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평화로웠다.” (돌베개)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 책은 5월 첫쨋주 기준으로 교보문고·영풍문고·YES24·알라딘 등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동녘), (동녘), (학고재), (오마이북) 등도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10위권 안팎에 자리잡았다. 서점가를 기준으로 보자면, 시민은 여전히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푹 빠져 있다. 서거 이후 1년 동안 출간된 노 전 대통령 관련 서적만 20여 권에 이른다.
자서전 아닌 자서전과 육필원고
노무현재단이 펴낸 는 ‘자서전 아닌 자서전’이다. 노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 전체를 기록한 이 책의 실제 집필자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노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자서전을 쓸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다. 는 “(유 전 장관이) 유족과 옛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대신 느끼고 대신 생각”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이를 ‘평전’이라 하지 않고 ‘자서전’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360여 쪽의 책은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구술·자필 기록을 모두 모아 기본 바탕으로 삼고, 관련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태 집필됐다. 책을 엮은 노무현재단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서전”이라고 설명한다.
본격 자서전은 아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육성 또는 육필을 담은 다른 책도 있다. (오마이뉴스)는 퇴임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인터넷 언론과 나눈 심층 인터뷰를 담았다. 퇴임 이후 남긴 여러 자필 기록도 이미 책으로 나와 있다. 회고적 내용을 주로 엮은 것이 (학고재)이고, 정치적 고민을 집중적으로 모은 것이 (동녘)다. 육성·육필의 섬세한 결이 갈급하다면 에 앞서 이들 책을 먼저 접하는 게 좋을 것이다.
‘노무현의 글’은 한정돼 있다. 그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에 대한 글’은 무한하다. 관련 서적의 상당수가 그런 내용이다. 는 명망가들의 기억을 담았다. 문재인·이정우·이해찬·유시민·정찬용·한명숙 등 참여정부 주요 인사와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도종환 시인·문성근 배우·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 등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서거 이후인 2009년 8월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진행된 강연 내용을 글로 엮었다. 이들은 각자의 기억세포에 남겨진 노무현을 추억하면서, 각자의 더듬이가 지향하는 ‘노무현 이후’를 말한다. 독자의 감성과 이성을 고루 자극하면서 “깨어 있는 시민이 되자”고 말한다.
(학고재)는 그닥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썼다. 대신 더 진솔하고 담백하다. 민주주의·시민·정치 등의 단어는 사라지고 ‘인간 노무현’이 서성댄다. 탄핵을 회고하는 문화평론가, 대한문 앞 추모 행렬에 섞인 PD, ‘꼽추춤’을 추던 야인 노무현을 기억하는 기자, ‘노사모’로 몰려 봉변당한 시민운동가, 봉하마을 사저 설계를 맡은 건축가, 대통령 의상을 담당했던 코디네이터, 초상화를 그린 화가 등이 각자의 노무현을 말한다. “진실로 울컥해지고, 아랫입술을 꾹 물고 애써 참아가며 가만히 손을 맞잡아주는 울림”에 대한 그리움이 책장마다 묻어 있다.
냉정하게 돌아보라
(한걸음더)은 그들보다 더 이름 낮은 시민들의 기억이다. “2009년 봄,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돌아보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모아 정리했다. 추도의 공간에 나온 평범한 사람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결심했는지 적었다. 검찰·언론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있고, 떠나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절절한 추모가 있다. ‘서거와 추모의 기록 I’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앞으로 2편·3편을 계속 내면서 더 많은 ‘n개의 노무현’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가 묻어난다.
분노든 그리움이든 열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의 눈으로 돌아보려는 책도 있다. ‘노무현 이후’에 대한 모색을 담고 있다. 는 그 모색의 기초다. 퇴임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시민사회, 신자유주의, 성장과 복지 등 여러 쟁점을 아우르는 책을 구상했다. 서거 이후 학자 39명이 모여 노 전 대통령이 메모로 남긴 얼개와 의견을 바탕으로 각각의 장을 채웠다. 68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관통하는 화두는 성장과 복지의 문제다. 미국 모델이 아닌 유럽 모델을 중심으로 진보 세력의 사회경제 전략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묻는다. 참여정부 시절 각료부터 진보 정당의 정책 브레인까지 두루 집필진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필자에 따라 초점이 조금씩 다르지만, ‘노무현 이후’를 폭넓게 고민하는 출발점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책도 있다. (창비)은 서거 이전인 2008년 12월 출간됐다. 결과적으론 서거 이후에 나온 책들과 비교해 온도 차이가 있다. 냉정한 시선이 아쉬운 이들에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출간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듯, 통일·외교·성장·복지·노동·지역·교육 등 각 분야에 걸친 참여정부 정책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집필진인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는 중도개혁 성향의 연구집단이다. 시장 개방을 전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좌파와 거리를 두고, 남북과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비판적·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참여정부와 결을 달리한다.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펴낸 (레디앙)는 여기서 한 걸음 더 왼쪽으로 간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른바 집권 민주화 세력들의 완전한 실패”를 분석한다. 지난 2월 출간된 이 책은 등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남긴 미래 모색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기도 하다. “이 정도 깊이 있는 고민을 하는 정치가가 전세계에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경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명석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 왜 그것밖에 못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의 기획이 시작됐다. 손호철·김상봉·정태인·홍기빈·강수돌 등 좌파 지식인이 각 분야의 집필을 나눠 맡았다. 참여정부 시절에서 비롯하는 오늘날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질곡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데 주력한다.
‘사실’이 더 필요하다(나무와숲)는 안보·통일 분야에 집중한다. 참여정부 시기 관련 정책이 어떤 논쟁과 대립을 거쳤는지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 책의 미덕은 ‘입장’이 아니라 ‘현실’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물론 안보·외교 분야의 주요 인사가 어떤 행보를 취했는지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를 빌려 독자는 노 전 대통령의 유산을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비슷한 역할을 해줄 사회경제 정책 분야의 연구서가 아직은 나오지 않았다. 입장 차이를 강조하기에 앞서 그를 진정으로 기리고 비판할 ‘사실’이 더 필요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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