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이다.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적 범주를 제시한 (새물결 펴냄·2008)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감벤은 현재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유의 ‘맹아적 저작’이라고 불리는 (난장 펴냄)은 비교적 가벼운 부피의 책이지만, 이 ‘사유의 거장’이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지를 안내해주는 압축적인 저작이다.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없는 현실아감벤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명령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치철학의 전통적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제에서 제1차 산업혁명이 구체제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면,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실종되고 또 망각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권과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용어들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서 그가 더 자세하게 발전시키게 되는 주제이지만,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신종 플루 사망자 수나 백신접종 대상자 수처럼 통계적 ‘숫자’로서 존재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호되며 관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그럼 다른 의미의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아감벤은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했던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생명의 다른 의미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좀더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단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삶에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이때 행복은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이란 자신이 가진 역량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정치 공간이며, 정치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우리 삶은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된다.
주권에서 벗어나야 사유되는 삶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현재의 삶이 과연 ‘삶-의-형태’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에서 돌이킬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로쟈 인터넷 서평꾼·blog.alad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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