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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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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흉작에도 김치는 쌓여간다, 마법처럼

인천 계양 편
친구가 준 ‘부모 배추’ 열 포기로 김장… 맛뵈려 부르니 묵은지·섞박지 들고 와
등록 2024-12-20 20:06 수정 2024-12-23 11:05

 

빨래 바구니에 배추를 절이는 모습.

빨래 바구니에 배추를 절이는 모습.


친구들 부모님 중에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여전히 철인 같은 체력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말마다 모두 텃밭에 가신다는 것. 그런 부모를 둔 친구들의 증언(?)은 늘 경이롭다.

평일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주말에만 가는 텃밭인데 최소 1시간은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거리다. 작은 텃밭을 둔 내 입장에서는 텃밭이라기보다 농사에 가까운 몇백 평 규모를 경작하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면 수확량이 킬로그램(㎏)이 아니라 톤(t) 단위로는 나올 거란다. 자급도 하고 일가친척에 이웃까지 먹이고도 몇 박스가 남아 자식 차에 실어주는 부지런함, 넉넉함. 모두 ‘효놈’으로 불리는 우리에게 없는 에너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들이 부모님 댁에 다녀올 때마다 몇 상자씩 실어오는 채소의 양은 하루 식사가 대부분 외식으로 굴러가는 도시의 자식들에게는 번뇌의 크기로 작용한다. 언제까지 이 먹거리를 받아올 수 있을까 하는 감사함과 뭉클함, 그리고 ‘이걸 해 먹을 시간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 처리하지?!’ 하는 복잡한 심경.

부패해 끈적끈적해진 채소를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집어넣으며 이 아까운 걸 다 어떡하냐며 하소연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이제 부모님 댁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로 ‘에스오에스’(SOS)를 친다. 그렇게 하지감자 한 상자와 오이와 가지 큰 봉지, 양배추 몇 통, 종류별로 차곡차곡 정리된 상추 같은 게 종종 집으로 배달됐다.

뭘 주든 감사히 받아먹는 자의 올해 결실은 배추와 김장 김치로 정점을 찍었다. 제1535호 농사꾼들에 적었듯 올해 배추는 60포기 중 서너 포기만 가까스로 생존했는데, 그마저도 생육이 더뎌 국 몇 번 끓여 먹으면 끝나는 정도의 수확이었다. 전국적으로 배추 대란을 겪은 터라 늘 주문해 먹던 김치마저 생산량이 줄어 ‘무한 대기’를 타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본가에 다녀온 친구가 배추 열 포기를 집으로 배달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배달해준 부모님의 배추는 내 배추와는 존재감부터 다르다. 속도 꽉 찼을 뿐 아니라 양손으로 공손하게 들어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와 무게감이었으니! 마침 농민들에게서 얻은 고춧가루도 많고 여기저기서 얻은 속 재료도 있으니 천일염만 사다 절여 있는 재료로 김장을 담갔다. 김장에 적당한 대야가 없어 빨래 바구니를 박박 씻고 분갈이 매트 위에 김장비닐을 까는 등 머리를 써야 했지만, 덕분에 냉장고 털듯 집 안의 채소를 싹싹 다지고 갈아 넣어 흐뭇한 갈무리를 했다.

집에 김치냉장고가 없어 발코니에 쌓아뒀더니 3주 만에 맛이 들었다. 친구들을 불러 김치찜을 내놓으니, 친구는 양손 무겁게 들고 온 커다란 장바구니에서 올해 김장, 묵은지, 섞박지 통을 꺼내 안겨준다. 솔직히 자식으로서는 매년 배추에 고추, 쪽파, 무 같은 속 재료까지 손수 키워 김장하느라 목 디스크 수술한 부모님을 생각하면 잘 먹어야 하지만, 김치냉장고에도 더 이상 남는 자리가 없다며. 겨우 한 통 비워냈더니 다시 가득 찬 네 통이 쌓이는 김치 마법이라니. 다음에는 친구들과 이 김치로 만두를 함께 빚어 먹어야지. 올겨울 김치 하나로만 풍족한 밥상을 차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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