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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집, 생존의 울부짖음

한국 사회의 변화과정 속에서 주거문화를 들여다보는 <한국 주거의 사회사>
등록 2008-09-12 17:06 수정 2020-05-03 04:25

한국 문화를 종적으로, 횡적으로 다양하게 진단해보는 출판 기획이 진행되고 있다. (전남일·손세관·양세화·홍형옥 지음, 돌베개 펴냄, 1만8천원)는 ‘한국 근현대 주거의 역사’ 첫 기획이다. 지은이들은 서론에서 “개항 이후의 근대적 주거환경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아 우리 주거사에 커다란 공백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첫 책인 사회사에 이어 미시사와 공간사의 측면에서 바라본 주거사 연구를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현장. 정부기록사진집.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현장. 정부기록사진집.

전쟁의 폐허 위에 세운 아파트

첫 책은 제목에서 보여지듯, 주거문화를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와 관련짓고 있다. 서양식 주거의 유입은 개항과 함께 일어난 주거문화의 첫 사건이었다. 개항 시기에 서양식 종교 건축물과 공사관이 세워지면서 서울과 주요 개항장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서구식 주거문화는 특히 왕가와 일부 상류 계층의 주택에서 시작됐으며 장사를 통해 부를 획득한 중인 계급 역시 사당을 개축해 목욕탕을 들이는 등 ‘신문물’ 수입에 앞장선다.

일제시대를 맞아 조선에 대거 유입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주택 부지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희박한 틈을 타 토지와 주택을 사들였다. 이 시기 주거문화의 가장 큰 변화는 주택이 거주지의 의미를 벗어나 재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통과 근대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일본식 주택이 조선의 기후에 맞지 않자 일본인들은 부분적으로 조선식 주택을 차용한 반면, 조선인들 중에는 일본식 주택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일식과 양식이 결합한 문화주택이 유행했는데, 전통적인 주거문화에 익숙한 몸이 새로운 주거양식을 거부하며 불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주택난도 점점 심각해졌다. 서울 주변에는 빈민들의 대규모 토막촌이 형성됐다. 일제는 일본인 노동자를 위해 ‘요’를 만들었다. 이는 한국에 처음 건설된 공동주택으로 도시형 아파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아파트’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일본 회사 파견 직원들의 복리를 위해 만들어진 콘크리트 건물들이다.

한국전쟁은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든 대재앙이었다. 전쟁 뒤 서울과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과 농민들은 청계천 판자촌 등 비참한 ‘불량주택’에서의 삶을 영위했다. 철거와 불법 건축이 되풀이되면서 서울에 ‘달동네’라고 불리는 곳이 생겨났다. 남산 3호 터널 주위, 용산2가 등에는 월남민들이 정착하면서 ‘해방촌’도 생겨났다. 정부는 외국 원조로 긴급 구호를 위한 무상 주택을 건설했으나, 주택난을 해결하기엔 턱도 없었다. 1957년부터 주택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장기적인 주택정책이 수립돼 주택 자금의 조달과 운영이 국제원조기구에서 산업은행으로 이관됐다. 또한 시멘트 생산이 늘어나면서 시멘트 블록을 사용한 단독 또는 연립의 국민주택이 본격적으로 건설됐다. 일제시대에 사원 숙소용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이때부터 일반 주택으로 보급됐다. 집단주택지와 아파트의 출현은 대규모 주택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개발독재 시기는 경제개발과 함께 대규모 주택 건설 계획이 실행된 시기이며, 국가가 주택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의 주거 선택과 소유 등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다. 일제 때 만들어진 조선주택영단은 한국전쟁 뒤 대한주택영단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대한주택공사로 재탄생돼 집합주택 건설에 앞장선다. 대한주택공사는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를 야심찬 대표작으로 내놓았다. 1960년대 말 서울 시장이던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대로 판잣집을 싹 밀어내버리고 졸속으로 시민아파트를 지어댔다. 이런 엉성한 아파트들은 1970년대에 이미 슬럼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로 그 치부를 드러냈다. 아파트는 급속히 계층화됐다. 서민 아파트가 산비탈에서 무너져가고 있을 때 다른 쪽에서는 호화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었다.

신도시와 투기 바람

1970년 11월5일, 서울시는 “과밀화되는 구시가지를 한수 이남으로 분산한다”는 남서울 계획을 발표한다.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택지 개발, 세제 혜택,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건설, 명문 중·고등학교 이전 등의 노력으로 강남 지역은 중산층의 거주 지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바야흐로 아파트 공화국 시대가 강남에서 도래한 것이다. 개발독재 시기 아파트 단지 건설은 주거에 의한 계층 간의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투기 바람도 일어났다. 집값이 폭등하자 1977년 정부는 주택청약제도와 함께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했다. 제도의 사후 관리가 철저히 되지 않으면서, 싼 분양가의 아파트는 고소득층에게 얼마든지 사서 되팔 수 있는 상품으로 부각됐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 계획이 마무리된 뒤에도 주택 부족은 해소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공급 계획을 발표하고 서울 주변 신도시인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개발에 나섰다. 바야흐로 신도시 시대가 펼쳐졌다. 이때 공급된 아파트들은 고밀화와 20층 이상의 고층화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아파트 대량 공급 시대를 ‘주택건설촉진법’이 뒷받침했다. 1992년에 건설된 주택 57만9천여 호 중 81.5%가 아파트였다. 1980년대부터 투기 심리는 그 어떤 정책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다. 분당 신도시 모델하우스가 공개되던 날, 분당으로 가는 도로는 피난민의 행렬처럼 꽉 메워졌다. 신도시는 주택 공급 확대라는 성과도 있었지만, 수도권의 인구 유입이 가속화돼 결국 서울이 수도권으로 광역화되고 비대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의 근대 주거사는 눈물겨울 정도로 처절하다. 서구와 일본과 한국이 충돌하고, 전쟁과 빈곤과 도시화가 겹쳐진다. 한국의 주거사는 살아남고자 울부짖는 우리 모두의 표상이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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