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논쟁 3탄…효율 극대화, 부자들의 자유주의
▣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교양학부
노무현 정부가 ‘개혁’의 이념을 선택한 정부였고, 따라서 노 정부의 실패는 ‘이념의 과잉’이 야기한 실패라고들 한다. 동일한 이유로 노 정부에 대한 국민의 거부는 이념에 대한 거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정말 이념의 과잉으로 실패했던 것일까?
이념적인 정부란 그저 어떤 이념을 구호로 내세우고 말로 떠들어대는 정부는 아닐 것이다. 이념이라고 불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끌어가고 그 이념을 구체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가 ‘이념적인 정부’라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념을 그저 말로만 크게 외칠 뿐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정부를 이념적인 정부라고 해도 좋을까? 그런 정부의 실패를 ‘이념의 과잉’에서 찾아도 좋을까?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이었다고?
잘 알다시피 노무현 정부는 재벌 개혁을 내세웠지만 재벌 개혁은커녕 재벌들에 대한 합법적인 통제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정부가 갖고 있던 권한마저 ‘시장’이란 이름으로 재벌이나 독점자본에 넘겨줬다. ‘참여정부’를 깃발에 써 들고 다녔지만 재벌과 유착된 관료들에 휘둘리며 그들을 ‘유능하다’고 상찬하던 정부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집값만은 잡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분양가 공개 등 자신이 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 정부였고, 퇴임하면 생태운동을 하겠다느니 말을 하지만 새만금이나 천성산 등 환경 관련 공약조차 하나도 남김없이 포기한 정부였다. 이런 정부를 ‘이념적인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처럼 자신이 내세운 이념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것을 행한 정부는 본 일이 없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는 자신이 내세운 이념에 반하는 정부라는 점에서 ‘반이념적 정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노무현 정부나 그 주변 세력들에 대한 국민의 거부 역시 이념 과잉과는 정반대의 이유에 기인한다. 그에게 염증을 느끼며 그를 떠난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한국의 재벌이나 독점 부르주아들? 그의 이념에 거부감을 갖는 보수적인 언론이나 보수적인 대중들? 그럴 리가 없다. 애당초 노무현을 지지하지도 않았던 그들이 어떻게 그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승부수’를 던지며 외쳤던 개혁적인 ‘이념’들을 지지한 사람들, 혹은 그가 채택했던 혁신적인 스타일에 매료된 사람들, 바로 그들이 통계적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노무현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고, 바로 그들이 노무현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념 과잉’에 지쳐서 노무현 정부를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은 정반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말로는 개혁을 떠들고 여기저기 나와 토론판을 벌이려 했지만 실제로는 개혁적인 어떤 것도, ‘이념적인’ 어떤 것도 실행하지 못했음에 실망하고 지쳤던 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개혁 없이 떠들어대는 개혁이란 수다에 지쳤던 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반대로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겐 어떤 이념도 없고, 오직 능력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만이 있다고 믿으며, 바로 그것이 노무현 정부와 반대로 성공의 기반을 제공하리라고 믿는 것 같다. 정말 그럴까?
예를 들어 조성환 교수는 실용주의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서 문제를 착안하고 그 바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념적인 목적 없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결과만 좋으면 좋다는 식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 그러나 목적 없는 실용주의, 아니 이념 없는 실용주의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예컨대 흔히 이용되는 덩샤오핑의 고양이 얘기에서도, 목적 없는 실용주의란 있을 수 없다. 덩샤오핑의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덩샤오핑의 실용적 선택은 ‘근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부의 모든 정책을 끌고 나간 ‘이념’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해가는 하나의 이념인 것이다.
끔찍한 공리주의 유토피아
평등·자유·공정성 등은 이념이 될 수 있지만, 시장·경제발전·근대화·돈벌이·투기 등은 이념이 될 수 없다는 말일까? 그거라면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결국 돈벌이로 귀착되는 그런 단어들이 ‘이념’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품위나 고상함과는 정반대로 천박하고 처절한 욕망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념이라고 부르기엔 부적절하다는 뜻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상한 이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들 앞에 내세우기엔 남세스러운 그런 욕망이 이념의 자리를 차지해 사람들의 삶이나 정부 정책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 말은 틀렸다. 그걸 이념이라고 감히 명명하진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실용적 ‘해결책’이나 정책, 조치들의 목적이 되고 있다면 실제로는 이념으로 기능한다고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목적 없는 실용성만큼이나 이념 없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념을 감춘 실용주의나, 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워 ‘이념 없다’고 잡아떼는 실용주의가 있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실용주의 자체가 이념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벤담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그것이다. 흔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알려진 구호로 인해 오해되지만, 공리주의란 ‘최소 비용에 의해 최대 효과를’ 얻으려는 이념이다. 생산성이나 효율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이런 의미에서 공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는 자유나 평등 같은 어떤 이념에도 관심이 없다. 다만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 것을 이념으로 할 뿐이다. 무슨 일이 되었든 성과를 극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점에서라면, 조성환 교수 말대로 이명박 ‘정부’는 공리주의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공리주의가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갈 것인지를 알기 위해선, 벤담의 공리주의가 종종 ‘원형 감옥’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팬옵티콘(panopticon)을 유토피아로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라선 안 된다. 팬옵티콘이란 감시자 한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모든 이들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인데, 말 그대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건축학적 장치다. 벤담은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공장, 나아가 정부 등 모든 곳이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앉아서 가끔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 공무원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체제. 실용주의가 이념이 되는 것, 그것은 우리를 저 끔찍한 공리주의의 유토피아 근처로 끌고 갈 것이다. 그래도 실용주의 말고는 이념이 없다고 자랑하고 싶을까?
‘당선인’의 명칭을 얻은 뒤 이명박의 행보는 그의 실용주의가 어디를 향해 하고 있는지, 무엇을 이념으로 하고 있는지를 이미 충분히 보여준 것 같다. 예를 들기엔 지면이 부족해 안타깝지만, 예를 들어 당선 뒤부터 1월 말까지 60회 정도의 일정 가운데 소외층과 관련된 것은 단 3회였다고 한다.
재벌이나 기업인들을 위해서는 정부가 아직 서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내줄 건 다 내주고 풀어줄 수 있는 건 다 풀어주었지만 자신이 공약으로 내건 ‘소외층’ 관련 문제들은 어느 하나도 유심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화합적 자유주의’란 분명 그들의 이념이다. 있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없는 자들이 ‘화합’해줄 것을 요구하는 이념. 그리고 ‘창조적 실용주의’란 “돈을 벌자”는 이념을 내세워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위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가리지 않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쓰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대중이 그들의 이념에 호응해줄까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이명박의 편향적 일정이나 반대자를 배제한 인수위의 영어 교육 공청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방해가 된다면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듣지 않고 간다는 ‘저돌적인 추진력’이 전술 원칙으로 추가돼야 한다. 그러나 이미 신자유주의적 탈규제의 부메랑으로 급속히 침체되고 있는 세계 경제나, 노무현 정부의 실효 없는 구호들에 지친 대중이 그들의 자유주의나 실용주의에 과연 쉽게 호응해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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