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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 집권 막기’라는 답답한 우물

등록 2007-07-20 00:00 수정 2020-05-03 04:25

김종엽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87년 체제가 만든 낡은 요새를 떠나라

여름호에서 김종엽 교수는 87년 체제에서 집권한 ‘자유주의 분파’의 성과와 한계를 논하고, 보수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화세력이 주도하는 정치적 다수화(진보연합)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장석준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665호에서 김 교수를 비판하며 민주화세력이 실은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는) 느슨한 ‘상징 연합’에 불과하며, 이해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연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666호 반론에서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보여야할 ‘집권 의지’를 보이지 못하며 기껏해야 자유주의 세력의 몰락을 관망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장 실장이 이 글에 대해 다시 반론을 보내왔다. 두 논객의 논쟁은 진영과 민주노동당의 차이만이 아니라 이번 대선을 맞이하는 진보진영의 고민을 담고 있다. 장 실장은 “낡은 요새를 떠나자”는 제안을 한다. 편집자

▣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필자가 지면을 통해 김종엽 교수의 글 ‘87년 체제의 궤적과 진보 논쟁’( 2007년 여름호)을 비판하자 김 교수가 666호에 다시 반론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글에서 김 교수는 단순히 개인 논평자로서 필자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필자가 일하고 있는 민주노동당까지 비판 대상으로 호명했다. 따라서 필자로서도 한 사람의 연구자나 논설가가 아니라 한 정치 세력 혹은 경향에 속한 자로서 발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해관계를 ‘과도하게’ 강조해야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김종엽 교수가 깔끔하게 정리해준 서로의 논점을 다시 한 번 짚어보고 그 의미를 되씹어봐야겠다. 필자는 김 교수가 한국 정치에서 ‘상징’ 연합의 역할을 특권화한 점을 비판하고 그런 식의 이론적 접근이 자유주의 분파의 정치적 허약성과 공통의 지반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민중 집단 간의 ‘이해관계’의 연계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적 다수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필자가 상징과 이해관계를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한 점을 비판한다. “해석과 상징화를 경유하지 않은” 이해관계의 정치가 가능하겠냐고 반문하면서 “이해관계의 정치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의 입장은 글의 맨 마지막 문장에 명쾌하게 제시된다. “(이행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해관계 또는 이해관계의 연대라기보다는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확증의 원천인 가치와 규범”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의 지적은 올바르다. 상징과 이해관계를 대립시키는 것은 자칫 속류 유물론적인 접근일 수 있다. 이해관계는 해석과 상징화의 끊임없는 순환 과정을 거쳐야만 정치화될 수 있다. 또한 가치와 규범이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준거라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여전히, 87년 체제의 불명예 퇴진이 이야기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가치와 상징의 정치에 맞서 이해관계의 정치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게 긴박하고 절실한 과제라고 믿는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와 상징화의 작동을 위해서도 그것들의 ‘외부’를 특권화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김 교수의 주장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막대는, 김 교수가 고집하는 방향과는 정반대 쪽으로, 될 수 있는 한 가장 과감하게 구부려져야 한다. 고상한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남발되는 상황에서는 어쩌면 속류 유물론이야말로 최첨단의 해방의 계기이겠기 때문이다. “너희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요”가 공허하게 되뇌어진다면, 이때 우리의 성스러운 과제는 무엇이겠는가? 역설적이게도,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세속적인 판본의 열렬한 전도사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선거 때마다 강박증 환자처럼…

좁은 지면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글의 거의 절반을 정치적 다수화 전략 이야기에 할애한다. 김 교수 자신은 “정치적 다수화는 자유주의 분파의 선거전술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체계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글의 어디에도 그 새로운 가치체계의 맹아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번에도 보수파의 대선 승리에 대한 염려를 풀어놓으면서 그러한 염려에 공감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민주노동당을 타박할 뿐이다.

김 교수는 말한다, 그런 답을 내놓기에는 자신이 아직 “대중의 정서와 마음의 행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존경할 만한 겸손함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문제가 이런 지나친 겸손함의 바로 뒷면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 의문을 가져본다.

과연 “깊은” 이해의 부족이 답을 찾지 못하게 하는가? 그 답을 찾는 데 과연 “깊은” 이해까지 필요한 것일까? 다른 누가 아닌, 저 6월의 거리에 함께했고 그것에 박수를 보냈던 사람들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고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정말 그 정도의 심오함이 요구되는 것일까? 혹시 “깊은 이해”가 부족한 탓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어떤 집착과 강박이 가장 간단명료한 이해의 가능성조차 가로막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에서 다시 가치와 상징, 이해관계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민주정치에는 확실히 가치도, 규범도 필요하다. 그러나 과연 그 가치는, 규범은 어디에서부터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가치 그 자체를 따지기 위해서도 그것의 ‘외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체계는 닫힌 원환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자기 해석과 확증만을 반복하면서 현실로부터 유폐돼버린다는 것이다.

보수파 집권 막기가 꼭 그러하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가치체계의 닫힌 원환 안에 갇힌 문제 설정이다. 선거 때마다 이렇게 강박증 환자처럼 보수파의 견제를 반복적으로 주장하면서 어느덧 87년의 가치체계, 더 정확히 말해 자유주의적 민주화 세력의 가치체계는 ‘외부’와 소통할 수도 없게 됐고, 그래서 그것을 해석하고 상징화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파를 지지하는 대중은 이해 불가능한 신비가 되어버리고, 보수파의 집권을 막겠다는 정치적 다수화 전략도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깊은 이해”의 부족을 말하지만, 어쩌면 부족한 것은 그게 아니라 그냥 ‘상식적 소통’일지도 모르겠다.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이 강박증 환자가 될 때, 대중은 우울증의 희생양이 됐다. 지식인들의 환상 속에서 ‘민주주의’가 보수파라는 불순 요소를 배제한 전체집합으로 나타나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대중은 “우리가 원했던 민주주의가 정말 이런 것이었던가”라는 회한과 탄식에 빠져들었다.

단호한 버림의 정치학

지금 참으로 시급한 것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는 일이 아니다. 한때 느슨하게나마 ‘민주주의’라는 상징 안에 함께했던 사람들 사이에 팬 이 깊디깊은 골에 가교를 놓는 일이 더 급하다.

그러자면 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구축해야 하고 상징의 정치도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이해관계의 대립과 연계를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주의 분파의 가치체계가 억압해온 그 이해관계의 끈들을 들춰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가장 소박하고 조야한 바람들과 재접속시켜야 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한 후보가 이야기하는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든, 다른 후보가 이야기하는 ‘제7공화국 건설’이든, 새로운 공통의 희망 아래 20년 전 그 혁명의 에너지를 되살려야 한다.

다만 이 선택에는 명백한 포기가 전제된다. 단호한 버림의 정치학이 필요한 것이다. 보수파의 집권에 노심초사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87년 체제의 그림자와 메아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성과 자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자는 것.

30년 전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당시 위기에 처한 좌파 동료들한테 한마디 충고를 던졌다. “낡은 요새를 떠나라.” 지금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미련 없이, 어떤 승리의 보장도 없는 전투에 나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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