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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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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소설인가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젊은 작가들이 일으킨 붐… 이념에서 벗어나 관찰자적 시선으로 한국 발견

▣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최근 들어 방송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 소설에서도 역사물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찬란한 현재를 살아가면서 작가들은 왜 고색창연한 ‘역사’에 매달리는 것일까? 이 모순적 현상에 어떤 설명력을 부여할 수는 없을까?

조정래의 , 김훈의 , 신경숙의 , 김탁환의 , 김경욱의 등이 최근 작가들이 보여준 역사소설의 목록이다. 김훈의 , 조두진의 , 김영하의 , 전경린의 , 김별아의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역사소설 붐을 선도한 작품들이었다. 북한에서 출판됐던 홍석중의 나 고 박태원의 같은 역사소설이 이쪽에서 재출간된 것도 역사소설 붐의 한 가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홍석중의 는 황진이 서사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드러낸다.

소재·주제의 협소함 돌파

이러한 역사소설 붐을 일별해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양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뭣보다 젊은 작가들, 상승 중에 있는 작가들이 역사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역사소설 하면 대개 중견작가나 원로작가의 몫인 것처럼 생각돼온 그간의 통념이 무색한 현상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아마도 역사소설이 일종의 흥행 보증수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김훈은 에 이어 을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분명한 작가적 위치를 획득했다. 그는 지금 가장 대중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같은 작품을 쓸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김별아의 같은 경우도 그렇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오랜 무명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폭넓은 대중을 획득하게 됐다. 그는 중편소설 에서 보여준 고전적 문장미로 신라 여인 미실을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세계일보문학상을 받으면서 문학계의 이단아로 부상했다. 또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는 문단 경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조두관을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김탁환의 경우엔 처음부터 역사소설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시장과 매스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이 보여주듯이 그는 사적 고찰에 능할 뿐 아니라 대중적인 취향이나 관심의 향방을 계산하는 지각력을 구비한 작가다.

이와 관련해서 작가들이 역사소설을 통해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소설이 소재, 주제 면에서 협소함과 빈곤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한국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 문학을 비롯한 외국 문학작품들이 국내에 홍수처럼 유입되고 있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작가들은 현재 대중에게 호소할 만한 새로운 소재나 주제를 민첩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역사소설은 원천 텍스트들이 이미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텍스트 자료들을 적절하게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로 창조해내기만 하면 되는 이점이 큰 장르다. 역사소설 장르에서는 작가적 경험의 깊이나 넓이, 현실에 대한 분석력이나 평가적 시선 같은 까다로운 요소들이 일단 2차적이다. 기록을 재가공할 줄 아는 능력, 기록의 결핍된 측면들을 새롭게 보강할 줄 아는 능력, 기록되지 않은 넓은 공간에 새로운 현실이나 환상을 축조할 줄 아는 능력 정도면 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현재적 현실을 그릴 때는 깊이나 넓이를 보여주지 못한 작가도 역사를 그릴 때는 문득 성숙한 것처럼 심오한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독자들을 문학시장으로 유인한다. 한국 소설이 보여주는 현재적 현실의 깊이 없음, 넓이 없음에 지친 독자들을 다시 한 번 문학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의 역사소설들은 기법적이다. 이들은 낯익음과 낯섦의 변주적 가치를 최대한 활용해 대중들을 유인해가는 최근 역사소설의 기법적 가능성에 착목한 결과물들이다. 파리에 간 조선 궁녀의 이야기라든가 한반도에 표류한 선원의 이야기라든가 유카탄반도로 떠났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그 낯섦으로 인해 일단 대중들의 관심사가 되고 또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선사하는 낯익음으로 인해 대중적 기반을 획득한다.

예외자적인 개인들 등장

따라서 최근의 역사소설들은 이념적이지 않다. 1980년대나 90년대 전반기만 해도 작가들은 자신의 이념을 입증하기 위해(작가들이 자신의 이념을 증명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소설을 썼다. 황석영의 이나 현기영의 등이다. 1960년대 말에 집필을 시작해서 1994년에야 완간을 본 박경리의 같은 작품은 인간의 언어로 인간사를 얼마나, 어디까지 서술할 수 있는지 실험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의 역사소설은 이런 유형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또 이것들은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다.

가령 중세 조선에 표류해 들어온 박연, 곧 벨테브레의 이야기를 다룬 김경욱의 은 무엇을 입증하려 한 것일까? 이는 단순히 보여준 것에 가깝다. 한 사람의 특이한 인생을 서사체로 만들어 보여준 것이다. 제물포를 떠나 유카탄반도로 향한 구한말 조선인들의 운명을 다룬 김영하의 은 무정부주의를 설파한 것이라는 논의가 제법 이루어졌지만 이것 역시 사상의 증명과는 별 무관한 소설이었다. 신경숙이나 김탁환의 이나 은 똑같이 구한말에 프랑스인을 따라 파리에 가서 머물다 조선에 돌아온 궁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것들에서 어떤 증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신경숙의 은 이색적인 소재에 짓눌린 감이 있는 반면 김탁환의 은 실증적인 근거를 확보하려 한 노력과 역사소설에 주력해온 수련이 합쳐져 조선에서 모로코의 탕헤르를 거쳐 파리로까지 나아갔던 궁녀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펼쳐냈다. 그러나 여기선 리심이라는 실존적 존재가 작가의 지식과 상상력에 의해 풍부하게 증명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작가적 이념이라는 말에 부합할 만한 분석, 해석, 평가 같은 요소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황석영의 은 심청전의 주인공을 고려나 조선에서 구한말로 옮겨놓고 동아시아를 주유토록 만들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의 공통성을 증명코자 했다. 잘 됐든 못 됐든 증명이란 이런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역사소설에서 어떤 시각들을 발견할 수 있고 또 발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역사를 이념에서 멀리 떼어놓으려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최근의 역사소설들은 예외자적인 개인들을 다룬다. 의 벨테브레, 또는 의 파리로 간 궁녀 같은 사람들 말이다. 조정래의 에 나오는 인물은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옮겨가고 여기서 다시 독일군이 됐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어 소련으로 송환되는 인생 유전을 겪어나간다. 최근의 작가들은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안정된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공동체의 울타리를 벗어난 경험을 가진 예외자적 존재들을 겨냥하는 경향이 있다.

와 민족주의 해체

나아가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최근의 역사소설은 한국의 역사를 내부자적 시선이 아니라 외부자적 시선으로 조감하는 경향이 다분해졌다. 한국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는 외부자적 시선에 의해 진단되고 평가된다. 예컨대 은 “아침에 용골대는 삼전도 본진을 향해 출발했다. 조선의 겨울은 투명했다. 추위 속에 습기가 없어서 먼 능선들이 도드라졌다”라든가 “용골대의 눈에 조선 행궁의 용마루 선과 지붕물매의 기울기는 수줍어 보였다”라는 문장을 구사한다. 신경숙의 은 “제물포에서 서울에 이르는 동안 콜랭의 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풍경은 낮은 언덕이나 산의 소나무 사이 어디에나 있는 묘지였다” 같은 문장을 수시로 등장시키고 이것은 김탁환의 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묘사나 설명들로 인해 최근 역사소설에 등장하는 한국의 자연, 문화, 역사는 내부자적 시선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고자 하며 그럼으로써 한국이라는 대상을 상대화함과 동시에 보편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은 하나의 독특하면서도, 그것이 개체로서 독특함을 가진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대상으로 새롭게 재생된다. 이러한 소설들에서 재현되는 한국은 야만적이 되기도 하도 아름다움의 기묘함이 후진성에 결합된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한국을 새롭게 재현하고 그럼으로써 재인식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소설들은 비숍 여사나 H. B. 헐버트가 한국을 보았던 것과 같은 관찰자적 시선으로 한국에 관련된 것들을 새롭게 부각시킨다.

한편 역사란 인간의 삶의 과정을 언어로 옮겨놓은 것인 만큼 이러한 언어화 과정에 이미 그 주체의 시각이나 이념, 세계관 같은 것이 투영되게 마련이다. 역사소설은 이렇게 언어화한 인간의 삶에 다시 한 번 언어화 공정을 시행하는 행위다. 역사소설은 이미 기술된 역사에 투영되어 있는 주관적인 요소들에 새로운 분석과 해석을 가한다. 소설 기법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어떤 역사적 요소들의 삭감과 첨가로 나타난다. 삭감과 첨가가 많고 다양해질수록 역사소설은 기록적인 측면 대신에 창안적인 특성을 풍부히 내포하게 된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작가는 바로 를 쓴 조두관이었다. 이 작품은 정유재란, 즉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교섭이 결렬된 뒤 일본이 조선을 재침공해 한반도 남단에 진을 치고 있던 시대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도모유키’라는 일본 쪽 군막장의 시각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전개해나갔다. 임진왜란이나 이순신 관련 서사물들이 지극히 민족주의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아주 이채로운 것이다. 민족주의는 민중들을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호명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이해를 위해 행위하도록 하는 측면이 강하다. 는 일본의 하위 무사와 조선 여성 사이의 심리적 유대를 통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심문하고 해체하고자 했다.

한국의 역사를 개방하다

나 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서사가 배제했던 실존적 개인의 내면 풍경을 전면화함으로써 역사소설의 이념적 성격을 해체하는 한편으로 국난을 그리고 이것을 응시하는 외부자적 시선을 개입시킴으로써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존재하는 한국의 험난한 상황을 상기시킨다. 이것을 새로운 타입의 민족주의 서사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반 양상들은 지금 우리 문단에서 본래 이념적인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는 역사소설의 한계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역사소설들은 무엇보다 우리 역사소설에 전통적인 공동체 및 이념지향적인 속성을 뚫고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삶을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인 시각에 개방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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