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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는 ‘탈이념’의 시대정신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695호 유종일 교수의 ‘실용인가 우왕좌왕인가’에 대한 반론

▣ 조성환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 기자회견에서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선택한 국민에게, 건국과 산업화·민주화를 넘어 경제와 삶의 선진화를 추구함으로써 위대한 대한민국을 열어갈 것”을 천명했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10년간의 진보·좌파 정부로부터 보수·우파 정부로의 변화라는 정권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은 시대사적 차원의 전환, 즉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체제’를 넘어 ‘선진화 체제’로, 그리고 ‘이념’에서 ‘실용’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편의주의·도구주의 함정 주의해야 하지만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시대정신을 ‘발전과 통합’으로 규정하고 “선진화를 통한 세계 일류 국가 실현”을 새 국가비전으로 설정했다. 이명박 차기 정부는 ‘고품격 국가’를 지향하는 ‘화합적 자유주의’(Harmonious Liberalism)를 국정철학으로, ‘창조적 실용주의’(Creative Pragmatism)를 그 행동규범으로 설정했다. 노무현 정부가 민족과 자주, 평등과 분배로 함축되는 ‘이념’을 정책노선의 키워드로 삼았다면,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를 행동규범으로 설정하고 ‘발전과 선진화’를 내세우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실용주의 정부’를 자처했듯이, ‘실용주의’는 새 정부의 정책노선을 견인하는 동시에 그 성공과 실패를 가름할 핵심 강령으로 자리잡았다.

당선 이후 이 당선자의 경제 살리기를 위한 적극적인 행보, 과감한 정부조직 개편 방안의 마련, 새 정부의 국정 우선순위 설정과 주요 정책개혁 사안을 신속히 내놓고 있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활동을 보며 많은 국민은 당면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태도와 실효적 해결 방안의 마련에 진력하는 이명박 정부의 실용·실무적 태도에 호의를 보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이념적 과잉’에 시달려 지쳐버린 대다수 국민은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 선언과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태도에 신선함과 희망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명박 정부를 준비하는 인수위원회의 적극적인 행보와 정책노선에 대해 우려와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호에 실린 유종일 교수의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읽었다. 유 교수는 대통령직 인수위가 마련하고 있는 구체적인 정책 사안을 들어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원칙 없는 편의주의나 성장 지상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미명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유 교수의 이명박식 실용주의에 대한 우려, 즉 원칙성의 결여 및 이상과 가치의 경시 가능성은 원론적 차원에서 충분히 경청되어야 한다. 동양 정치사상에서 나타나는 실용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實事)에서 문제를 착안하고 그 바른 해결책을 찾는(求是) 것’을 의미한다. 서양, 특히 영미의 정치사상에서는 ‘문제에 대한 실험주의적 태도’(듀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벤담)를 포괄하고 있다.

즉, 실용주의는 선험적 원칙이나 이념적 가치, 그리고 보편적 이상이 아니라 사실적 존재나 문제 그 자체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험적이며 공리적인 접근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용주의가 원칙과 가치를 보존하면서 공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과 문제 해결에 대한 전략적 태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편의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아울러 실용주의가 단순히 양적 성장의 수단이나 기계적 행동규범으로 일률화될 경우 도구주의(Instrumentalism)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유 교수의 비판은 이러한 정치사상적 입장에서 유효할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특히 유념해야 할 철학적 척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념의 과잉을 극복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채택하되 공동체의 원칙, 가치와 이상의 진작을 위한 ‘성찰’ 있는 정책의 기획과 집행을 추구해야 실용주의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원칙·편의주의, 지금으로선 예단 힘들다

그러나 현재 단계에서 본다면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여지는 많지 않다. 이명박 차기 대통령과 대통령직 인수위가 천명한 실용주의 행동규범은 통치자나 지배세력의 세계관과 이념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이 봉착한 ‘문제’들에 직면해 그 해결책을 도모하는 국정관리의 태도와 노선에 해당한다. 아울러 이념주의가 기존 질서를 뒤집고 혁명에 가까운 ‘개혁 지상주의’로 흐르기 쉬운 반면에 실용주의는 점진적 차원의 개조와 개선을 일상화할 수 있게 되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 선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이념 과잉, 이에 따른 국론 분열과 갈등, 개혁의 구호화라는 요란하고 피곤한 현실을 거치면서 안정과 변화를 동시에 바라는 다수 국민의 새로운 바람과 기업 경험과 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체화된 이명박 당선자의 최고경영자(CEO)형 리더십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발전과 통합을 유도할지 아니면 무원칙과 편의주의에 빠질지는 현재로서는 예단하기 힘들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 교수의 비판과 이에 동원된 예증은 이명박 정부의 행동규범으로 천명된 실용주의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기 어렵다. 유 교수의 비판은 이명박 정부의 성격과 정책방향에 대한 이견과 평가에 의존함으로써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의 논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먼저, 유 교수의 글은 인수위의 정부조직 개편안과 개별 정책 제안의 몇몇 문제점, 예컨대 대학 자율과 입시정책의 마찰 가능성, 통신요금 인하 강제에서의 관치주의의 가능성, 금융위원회의 강화에 따른 문제점 등을 들어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를 무원칙적 편의주의로 폄하하고 있다. 우려 섞인 유 교수의 비판적 논조는 개별 정책 사안의 국부적 문제점을 들어 정책노선 자체의 흠결로 단정하는 것으로 비약되고 있다.

다음으로, 유 교수는 이명박 당선자의 대표적인 정책공약이나 이 당선자의 리더십 경험에 대해 편견에 가까운 단정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는 있을 수 있으나 유 교수와 같이 이 당선자의 7% 경제성장 공약이 곧 맹목적 성장 지상주의로, 그의 강한 추진력이 일방적 성과 지상주의로 귀결되리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예단이 아닌가 싶다. 다수의 국민은 낮은 성장보다 높은 성장이 발전과 동시에 양극화를 더 잘 해소할 수 있는 것으로, 이명박을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이룬 인물로서보다는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 사업 등 공익을 목표로 민주적인 설득의 리더십을 발휘한 유능한 지도자로 본다는 점을 유 교수는 간과한 듯하다. 이명박의 추진력은 기획과 설득 능력에 근거한 것이지 독선과 강제가 아니다.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구조화되어야

필자는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성공을 맹신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지난 10년간의 진보를 자칭한 좌파정권의 민족·통일 지상주의, 명분론적 자주외교, 기계적 평등에의 맹신과 분배 우선의 구호정치, 정치의 도덕화(Moralization)에 의한 배제와 제압의 분열정치 등 이념정치의 분출을 지양하고 발전과 통합으로 21세기 국가 선진화를 체계적·전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차원에서 필자 역시 실용주의는 더욱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첫째 지난 10년의 좌파적 이념정치에 식상한 많은 국민의 실제와 실질에 대한 갈구가 반영되어 있어 정치·행정적 차원의 편의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며, 둘째 화려한 수사나 구호적 허세보다는 공리에 민감한 이 당선자의 실적 위주의 CEO형 리더십과 잘 융합해 상승적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탈이념의 ‘시대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새 대통령을 필두로 한 새로운 정치·행정 세력에 의해 전략적으로 잘 운용되어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견인할 행동규범으로 그 효력이 발휘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뿐 아니라 다수 국민의 기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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