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사상의 맥을 잇는 작업들… 세계화에 맞서는 진보적 정책 대안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고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을 재조명하는 학술 토론회가 열린 것은 추석 연휴 직전인 9월21일이었다.
서울 정동 배재정동빌딩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 이 토론회에선 의 작가 조정래가 기조강연을 맡았고, 장상환 경상대 교수,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와쿠이 히데요키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 등이 주제 발표자로 참석했다.
타계 10주기, 전집 출간과 토론회
이번 토론회는 박 선생 타계 10주기를 맞은 지난해 생전의 글들을 묶은 7권짜리 (도서출판 해밀) 출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자립경제론 민족경제론: 세계화 시대 박현채 경제 사상의 의의와 재구성’을 주제로 한 토론회 개최의 연장선이다. 여기에 조석곤 상지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를 비롯한 제자들이 ‘민족경제연구소’ 설립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박현채 사상의 맥을 잇는 작업은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다.
문학판에조차 ‘민족’이란 글자를 지워내려는 21세기에도 ‘민족’경제론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글로벌’과 ‘세계화’의 화두로 뒤덮여 있는 지금의 경제판에서 민족경제론은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민족경제론을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조석곤 교수는 민족경제론을 “빈곤국가가 자립경제를 이룩해가는 경로에 대한 일종의 청사진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그 시절에 대외지향적 정책을 버리고 내재적인 발전 경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사회의 발전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민족경제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화 과정은 그 자체가 국경의 존재를 전제한 것이며, 성과 배분의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 시대에도 민족경제론적 시각은 필수적이다.”
조 교수는 민족경제론의 현재적 의미를 놓고 과 이메일, 전화로 문답을 주고받은 데 이어 9월21일 토론회 참석 직전 따로 만나 박현채의 생애와 사상, 그와 맺은 인연에 대해 추가로 들려줬다. 그는 대학원(서울대 경제학)에 다니고 있던 1985년 어느 날 한길사 주최의 역사기행에 참여했다가 박 선생을 만난 게 첫 대면이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박현채 선생의) 글은 학부 때부터 읽고 공감을 느꼈지만, 직접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몇몇 연구자들이 선생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게 됐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좀더 공식적으로는 1988년 한국사회과학연구소(한사연·당시 명칭은 한국사회연구소) 창립 과정에서 선생님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면서부터였다.” 한사연은 당시 한창 진행된 ‘사회 구성체 논쟁’이 현학적으로 흐르면서 본래의 취지와 방향을 잃고 있다는 성찰 속에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는 목표를 갖고 설립됐으며, 소장 학자들의 생각에 박현채 선생도 적극 지지해줬다고 한다.
‘지구화 시대의 공공성’ 프로젝트
조 교수는 “박사 학위논문 지도 교수인 안병직 선생한테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면, 박현채 선생께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박현채와 민족경제론의 어떤 점이 젊은 학자를 매료시켰던 것일까?
민족경제론은 정치한 경제이론이라기보다 대외종속적이고 대기업 위주의 성장 일변도로 치닫는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에 대항하는 실천적 주장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박정희 모델을 선의로 보면, ‘파이’(몫)를 키우는 게 먼저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현재의 고통을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거다. 반면, 민족경제론은 속도는 더뎌도 (현재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분배도 챙겨가며 가자는 쪽이었다. 민족경제론은 박현채 선생 개인만 사용하던 개념이 아니고 1960~70년대 진보학계가 공유하고 있던 논리적 사고 틀이었다.”
박정희식 모델을 둘러싼 대립각은 경제학에서 주도적인 전선을 형성하는 두 흐름과도 맥을 같이하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를 둘러싼 대립과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 교수는 “경제적 차원으로 보면 민족경제론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시장에만 내맡기는) ‘사적 효율성’보다는 (공동의 시너지 효과인) ‘집합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규범적’ 입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민족국가는 성과의 불평등 배분을 제도적으로 수정해주기도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 정부’는 그러한 일을 수행해주지 않는다. ‘민족’과 ‘경제’의 연관 고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조 교수를 비롯해 정대화 상지대, 조희연 성공회대, 김상곤 한신대 교수 등 민족경제론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 학자들이 박 선생의 사상적 맥을 잇고 현실적인 대안 찾기에 나선 대표적인 노력의 하나로 1999년 민주사회정책연구원(민사연)의 창립을 꼽을 수 있다. 민사연은 상지대, 성공회대, 한신대 3개 대학 교수들이 모여 구축한 민주대학 컨소시엄 형태의 공동 연구소다. 조 교수는 “폐쇄적인 한국의 대학 사회에서 대학 울타리를 넘어 만들어진 연구소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유례없는 일이고, ‘한사연’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정책 대안의 구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경제론의 문제의식에 뿌리가 닿아 있는 민사연은 해마다 연구총서를 발간하고 6개월마다 학술지를 내왔으며, ‘지구화 시대의 공공성’이라는 주제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조 교수는 “‘공공성’ 프로젝트는 현재 발전 모델이 없는 한국 사회의 위기와 그 문제점을 비교역사적인 방법으로 모색하고, 이러한 연구에 기반해 발전 모델의 새로운 이론화를 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공성 프로젝트의 하나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공성 지표’ 개발이다. 조 교수는 공공성 지표의 의미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미국의 인종 분포와 정치적 지배계층의 인종적 분포를 예로 든다. 미국의 전반적인 인종 분포가 정치권의 지배세력의 인종 분포도와 비슷하다면 실질적인 민주화가 비교적 잘 이뤄져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라는 설명이다.
민족경제론적 발전의 길을 걸었다면?
한국 사회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면, 예컨대 유권자들의 소득 분포와 국회의원들의 소득 분포도가 얼마나 유사성을 보이느냐에 따라 공공성 수준을 따져볼 수 있다는 얘기다. 1인1표의 동등한 참여의 권리가 보장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수는 없어도 이를 잣대로 삼아 공공성을 담보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수준을 점검해 대안을 제시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앞으로 2~3년 동안 각국의 사례를 수집해 모형을 만들고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하는 장기간의 방대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민사연의 또 하나 주요 과제는 박현채 선생의 사상을 집중 연구해 현재적 의미를 되살리는 전문연구기관 ‘민족경제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이다. 조 교수는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박현채 선생의 뜻과 연구원의 취지에 공통되는 부분이 있어 민족경제론을 재검토한다는 뜻에 따라 제안돼 (별도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보 경제학계로 줄곧 이어지고 있는 민족경제론에 따른 발전 모델을 따랐다면 오늘의 한국 경제·사회는 더 나은 모습을 띠게 됐을까? ‘박정희식 개발 모델’을 채택한 한국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 그 대척점의 민족경제론은 현실적합성이 결여됐던 것으로 치부해야 할까?
조석곤 교수는 “실제로 민족경제론적 발전의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며 “다만, 지금의 성공이란 게 모두 박정희식 정책에 기댄 것이냐 하는 점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외향적’ 자본 동원이 성공해 현재의 고도성장 기틀이 마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와 오일쇼크(1970년대의 석유파동)에 따른 중동 특수, 3저 호황 등 외적 계기가 없다면 ‘박정희 모델’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 교수는 또 “박정희식 모델 속에는 (민족경제론과도 통하는) 수입대체적인 국내 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미국의 압력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19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게 그 예다. 대외의존적 성장 일변도가 아니라 자립적이고 분배론적인 경제 모델을 채택했더라도 (국제정치 역학상)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지원을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란 점도 감안해야 한다.” ‘민족경제론적 접근=곧 실패’로 여길 수 없다는 뜻이다.
한-미 FTA, 일단 비준 저지해야
박현채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민족경제론의 맥을 잇는 동시에 빠르게 변하고 있는 국내외 경제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오늘의 한국경제는 글로벌 환경에 깊숙이 편입돼 있어 1960~70년대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자립적’ 민족경제론으로 돌파해내기엔 버거운 게 현실이다. 9월21일 토로회에서 주제발표를 한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재벌 독점자본의 지배 강화, 외국자본과의 협력 강화, 양극화 심화 등 자본 과잉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 한국 상황에서 ‘자립경제’ 민족경제론은 현실적 의의를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현채의 사상을 ‘개방적’ 민족경제론으로 새롭게 가다듬어야한다는 뜻이다.
장 교수는 그러면서도 “미국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에서 보듯 글로벌 자본주의는 경제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있다”며 “사회적 조절의 강화, 사회적 소유 및 민주적 통제의 강화,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 강화 등 대안적 경제 전략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경제론적 접근이 여전히 필요함을 일컫는 발언이다. 한국 사회의 최대 경제·사회적 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보는 시각에도 이런 인식이 배어있다. “한-미 FTA는 고용 감소와 구조조정 촉진으로 한국 경제와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일단은 비준안을 저지하는 게 옳다. 인근 국가인 중국, 일본과 경제협력을 강화한 뒤 상품무역의 관세율 인하를 중심으로 하는 낮은 단계의 한-미 FTA 체결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조석곤 교수의 지적처럼 국민경제의 영역을 넘어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로 발전하는 지금도 세계는 여전히 민족 문제로 시끄럽다. 또 개별 국가의 패권을 향한 몸부림은 더 강해지고 있다. 여기에 남북 분단 문제가 여전히 미결 과제로 남아 있고, 빈부 격차는 점점 더 깊어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천안 공원묘지에 묻힌 민족경제론의 박현채 선생을 자꾸 불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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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경제학의 핵심을 이루는 ‘민족경제론’은 1978년 한길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에서 비롯됐다. 재야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던 박현채 선생이 1970년대 초·중반에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글들이 한데 묶여 출판되는 과정에서 ‘민족경제론’이란 이름을 얻었다.
민족경제론은 대기업 중심의 대외의존적인 전략을 추구한 ‘박정희식 경제발전 모델’에 맞서는 대안적 의미를 띠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는, 농업 문제에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서 나아가 ‘농업 협업화’를 주장했다. 민족경제론의 한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실천적 대안으로는 ‘중소기업 육성론’을 꼽을 수있다. 1960년대 후반 외세의존적 경제개발 계획이 진행되면서 깊어진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중소기업 또는 중소자본을 민족경제의 육성 주체로 삼아 매판적 경제구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자립적 국민경제, 한국형 혼합경제 체제, 특혜 금융 폐지와 중소기업 금융정책 우대, 사회보장기금 신설 등을 주내용으로 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경제론은 개발 독재와 특권적 재벌 경제 체제에 맞서는 진보적 대안의 뿌리로, 진보 성향의 학계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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