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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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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중’과 싸우는 일이 진보다

등록 2007-08-21 00:00 수정 2020-05-03 04:25

‘네티즌-대중’은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인식돼야

▣ 함돈균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시민법정에 기소됐을 때, 그의 기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을 모독한 죄. 또 하나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꾀어 위험하고 거짓된 이야기로 그들을 현혹한 죄. 그러나 이 추상적인 기소 이유의 실제 내용은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구도적 자세로 진리를 추구했던 이 철학자의 학문적 입장을, 아테네 시민법정이 자신의 정치체제인 ‘민주정’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던 것과 관련된다.

소크라테스가 반대했던 것

소크라테스의 엄정한 진리는 개개인의 능력상 대중 모두의 진리로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사물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자가 국가 운영을 담당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생 동안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던 이 철학자의 사상이, 두 번의 쿠데타-독재체제의 등장에 의해 아테네 민주정이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에 법정에 회부됐다는 점은, 이 역사적 재판이 실은 ‘국가보안법’ 위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오히려 ‘독재’의 위험을 경고한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참주정이라고 불리는 1인 독재체제가 오히려 대중이 주도하는 민주정에서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성과 절제와 명예심이 결여된 채, 이기주의와 정확지 못한 지식으로 움직이는 이 불특정 다수의 ‘포퓰리즘’적 정치체제야말로 진리의 적이요, 정의로운 정치체제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심형래의 가 문화방송 의 주제가 될 것 같다는 ‘안 좋은 예감’은 적중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라는 영화-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한동안 잠잠했던 ‘네티즌-대중’이라는 저 익명적이면서도 대단히 공격적인 포퓰리즘의 귀환이라는 정치사회적 현상이다. 진중권이 이 프로에서 의 코드로 요약한 애국주의·민족주의·시장주의·인생극장의 네 가지 코드는, 이 영화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한 평론가들에게 수천 건의 ‘악플’로 집요한 ‘복수’를 행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유의미한 정치적 공론장 한복판에 들어서 있다고 생각하는 저 네티즌-대중의 코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국가-시민사회-시장 전반의 저열성이 네티즌이라는 대중사회적 현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황우석 사건의 완벽한 복사판이기도 하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말한 ‘국민 교수’ 황우석에 열광했던 이 ‘네티즌-대중’은,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영화에 줄곧 어떤 허점이 있다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2분여의 아리랑 엔딩 사운드를 듣는 순간 벅찬 감동에 젖어 기립박수를 치고는, 영화적 허점을 지적하는 저 ‘공공의 적-평론가들’에 대한 집단적 돌팔매질에 분연히 참여한다. 이들은 지식인이 진리에 순종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없으며, 비평가는 오직 제 자신의 엄정한 비평적 판단에만 의지할 뿐 국가와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추종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독서가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 으로 역사를 배우는 ‘하향 평준화’된 대중이 인터넷을 통해 고구려사 논쟁을 주도하고, 애국주의와 시장주의적 가치관에 매몰된 ‘소비대중’이 배용준과 보아라는 ‘문화산업’의 수출을 문화의 전파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현실이다. 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채, 사물에 대한 체계적 지식과 논리적 해석을 결한 채로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이 위험스럽고도 강력한 유령적 정념은, 얕은 ‘호기심’과 ‘잡담’, ‘애매한 이야기’로 일관하는 하이데거의 ‘일상인’(das man)의 속성을 그대로 닮았다.

내가 보기에 이제 ‘네티즌-대중’은 문화 현상이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민주주의의 번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와 ‘쇠퇴’와 관련한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에서 폭넓고 무차별적으로 감지되는 ‘평등주의’의 열망이 지닌 함정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평등’의 문제가 지닌 진보성은 오로지 ‘정의’의 문제와 관련될 뿐, 평균적 수준의 대중 또는 하향 평준화된 대중을 양산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오랫동안 ‘민중’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주체를 전제하고 외부의 전체주의와 싸워왔던 한국의 시민사회는, 하향 평준화된 대중의 지적 능력과 판단을 그 자체로 ‘정치적 옳음’으로 간주하는 무반성적 관성에 빠져버린 것 같다.

평등주의의 열망이 지닌 함정

예컨대 교육개혁을 이야기하는 ‘진보세력’의 대안은 교육의 질적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 정치적 각성과 실력을 겸비한 ‘시민적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일이 아니라, 추상화된 내신 반영 비율 문제와 사교육 해방이라는 손쉬운 대중추수적인 ‘정치적’ 해법(이는 교육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에 목숨을 걸고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정권 쟁취가 불가능했을 현 정부가, 정부 출범 당시 상당한 시민적 공공성을 지니고 있던 인터넷 공간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타락시킨 것도 이 상황에 한몫했다. 파당적 정치공간으로 변질된 오늘의 인터넷 토론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을 창출한 최초의 세대가 이지성과 시민적 공공성을 저버릴 때, 그들이 이토록 집요하고 폭력적인 열정으로 변질된 ‘네티즌-대중’이라는 정치 현상으로 귀환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여기에 더해 ‘네티즌-대중’이 전문가적 가치판단을 폄하하고, 지식인의 사회적 소외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황우석 사태에서 의혹을 제기한 양심적 과학자들이 철저히 왕따당했던 일이나 현상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지금 전문가적 견해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공공의 적’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평균적 개인’인 대중에 의해 전문가들의 견해가 ‘공공의 적’처럼 간주되는 사회에서, 수상한 음모론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것은 말의 공공성이 오염된 사회이며, 지식에 대한 신뢰와 정당한 권위가 사라진 시대일진대, 한국의 대학사회 전체와 다양한 지식인 집단을 부패세력 내지는 이기주의 세력으로 계속 몰아붙이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포퓰리즘이, 이런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은 이 지점에서 꼭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미국 지식인의 사회적 소외

뜬금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미국이 지구적 단위에서 행하고 있는 저 거대악들에 대해 미국 내에서 좀처럼 자성적 반론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사회적 소외 현상과 관련이 있다. 사르트르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실천적 지식인이자 대학자인 노엄 촘스키 같은 이의 목소리가, 오히려 자신 사회 내에서는 철저히 대중과 유리되어 있으며, 그의 반국가주의적 성향이 그들에게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진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국가폭력과 같은 외부의 거대 정치악과 싸울 때 옹호해야 할 것은 ‘민중’이었고 ‘시민’이었으며 ‘개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싸움은 우리 시민사회 내부를 향해야만 한다. 내가 보기엔 (‘시민’이 아닌) 이 ‘평균화된 대중’의 ‘근거 없는 신념’과 ‘폭력적 정념’과 싸우는 일이 이제 진보다. 소크라테스를 두 번 법정에 세우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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