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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최현숙씨 출마를 계기로 짚어본 진보정당운동과 성정치

▣ 권김현영 국민대학교 강사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지난 3월3일,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서 국회에 도전하겠다며 진보신당 연대회의의 최현숙씨가 출마 선언을 했다. 이 출마 선언이 기사화되자마자 다음과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커밍아웃 국회의원’이 등극했다. 멀리는 프랑스의 들라노에 파리 시장부터 가깝게는 일본 참의원에 출마했던 오쓰지 가나코까지 성소수자들이 피선거권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이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검색어 1위까지 차지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 이유는 이 사건이 다름 아닌 한국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의 국회의원 출마가 우리 사회의 성숙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지, 아니면 또 하나의 이색 후보 탄생으로 읽힐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를 통해 진보정당운동과 성정치의 만남에 대한 담론장이 열린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포함과 배제에 기반한 시민권 요구

1천 개가 넘게 달린 댓글들에서 이전의 동성애 관련 기사나 논쟁장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질문이 눈에 띄었다. “레즈비언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진보신당 연대회의의 게시판 등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과연 레즈비언이 진보의 외연을 넓힐 수 있을까?” “대중은 이해할 것인가? 너무 특이해서 주목을 끌지 모르지만 그것이 일종의 선정주의인 것은 아닌가?”

‘레즈비언이 (이성애자인) 우리를 대표하다니! (이성애자인) 우리가 관용을 베풀어서 그들을 인정해줄 수야 있지만 대표한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라는 호들갑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동안의 진보 혹은 민주 정치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해온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누구나 그 ‘존재’로 인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근대 민주주의 기획 아래, 지금까지 소수자들의 정체성 정치학은 우리도 너희한테 포함시켜달라, 인정해달라는 형태로 이루어져왔다. 그런데 이러한 인정 요구는 몇 가지 내부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는 첫째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며, 둘째 누구나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사회와 계약을 맺을 수 있으며, 셋째 선거라는 형식을 통과하면 누구나 서로의 대표로서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조항, 선거라는 형식은 근본적으로 다수에 대한 설득을 전제한다. 펠란의 말을 빌리자면,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변화를 정당화해줄 만큼 다수를 설득할 때에만 소수가 룰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문제는 소수라는 위치에 대한 강조로는 이러한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인정했으나, 여성들의 참정권은 유보했다. 여성은 가족 내의 남편 혹은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독립적인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이른바 ‘혁명파’의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선거권이 인정된 뒤에도 여성들의 공직선거 진출에 대해서는 또 한 번 사회적 논쟁이 필요했는데, 이때 논란의 핵심은 여성들이 과연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넘어서 남성까지도 대표할 수 있는지였다. 레즈비언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느냐는 네티즌들의 질문은 그러니까 지금까지 정체성을 인정해주는 인권 정치의 틀 안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던 기존 인권 혹은 문화운동이 ‘포함과 배제’라는 틀을 유지한 채 ‘승인과 인정’을 요구해왔다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더 추가해서 수정하자는 법 제정과 개정의 기획 등에서 다양성의 요구는 탈정치화되며, 권력관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호주제 폐지 문제만 해도 언제나 사회적 합의의 문제에 걸려 폐지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2007년 말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 지향과 학력, 나이, 병력 등 7개 조항을 삭제하면서 법무부와 정부가 주장했던 것은 사회적 논란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언젠가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포함될 것이지만 아직은 어렵다는 ‘시기상조’ 논리는 곧 누가 포함과 배제를 결정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즉, 소수가 다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소수라는 위치를 은폐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인권 보호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큰 틀에 동의하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가시화된 제도적 차원의 포함과 배제 원리를 다시 무의식의 차원으로 내려보내려는 의식적 노력으로서 실행된다. 여기에서 이 의견에 동의하는 ‘나’는 안정된 정체성을 가진 어떤 범주에 머무르는 사람이며, 지금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포함될 수도 있는 ‘너’가 ‘나’처럼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독단적 자아이다. 이러한 정치적이지 않은 다원주의는 펭 초아의 말을 빌리자면, “시민권 없던 이들을 제도적 담론 속으로 포획해내는 폭력적 역할을 할 뿐”이다.

비가시화, 오랜 차별의 결과

포함과 배제에 기반한 시민권 요구가 가지는 또 다른 한계는, 이러한 포함과 배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차이들이 은폐된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 차이들은 그냥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존재로서 고정되면서 은폐된다. 이러한 비가시화는 오랜 차별의 결과로서 흔히 드러나는 현상이다.

미국의 경우 1967년 스톤월 항쟁 이후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양성애자들의 인권운동이 조직되었다. 또한 70~80년대에 일어난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을 통해 기존의 이성애 가족중심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이 이뤄지고, 레즈비언-퀴어 소비공간이 도시에 자리잡고, 90년대에는 군대와 결혼, 입양 등 공공 영역에서 성차별과 성정체성에 따른 제한을 해제하라는 집단적 압력이 조직화되는 역사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퀴어 정체성이 공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2000년 클린턴 행정부는 보수 쪽과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인권운동가가 상반된 압력을 행사하는 사이에서 군대에서의 동성애 차별에 대해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벽장에 가두기’(Closeting) 정책을 취한다. 이런 문제에서 우파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좌파는 찬성하면서도 그것이 공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서구와 달리 가족중심 문화가 더 강력하고 조직적인 저항운동의 경험이 일천한 한국과 대만 등의 나라에서 성소수자는 더욱 비가시화된다. 한국과 대만 등에서는 거의 사회적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 대만 학자인 류런펑과 딩나이페이는 “대만에서는 고아만 커밍아웃을 할 수 있다”며 이는 가족중심 문화가 강력한 아시아권의 특징이라고 진단한다. 또 아시아 게이·레즈비언 문화의 특징은 동성 사이의 스킨십 등이 상대적으로 더 용인되는 상황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미국 등 서구 사회에 비해 용이하다는 데 있다. 여자 둘이 손을 잡고 지나가도, 화장실에 같이 가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커밍아웃을 하면서 존재를 가시화시키려는 것에 대해 커뮤니티 내의 거부감이 있기도 하다. 브라이도티는 가시성(visibility) 자체가 권력이며, “응시란 모든 인식론적 지각의 바탕인 이성중심적 조직의 눈”이고, 이는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을 향한 욕망으로 달려간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가시성 자체가 권력의 틀 안에서 주조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가시화하기가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트랜스젠더의 성별 변경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기 전환 수술과 호르몬 투여가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트랜스젠더들이 성기 전환 수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트랜스젠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기 전환 수술을 해야만 한다. 트랜스젠더 내부의 차이를 다시 은폐하면서 존재를 인정받는 전략은 언제나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차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냈던 정체성의 정치를 넘기 위해서는 정체성의 고정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존재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인식론에 기반한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 주체의 ‘사회적 구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정의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수반되어야 하며, 정체성은 성별, 인종, 계급, 나이 혹은 성적 선택 등 일련의 잠재적으로 모순적인 변수들이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름이라는 것, 그래서 그것은 다중적이며 늘 혼란스러우며, 타자와의 끈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관계적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정체성이 구성되며, 혹은 변화한다는 것은 나 혼자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합법적이 된 합리성과 안정성 안에서 인정을 구하면서 자신의 일부를 억압할 것을 요구받는 근대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다양성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인정하는 탈근대적 주체일 때 ‘민주주의’는 언제나 실패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실패하는 것이 당연한, 하지만 언제든 변화 가능한 장으로서 다시 사고될 수 있다.

새로운 논쟁의 장이 열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과연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새로운 논쟁의 장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동성애를 인정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의 해묵고 낡은 논쟁은 이제 동성애자의 시민적 대의성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질문은 그냥 ‘일반인’이었던 사람들을 ‘이성애자’로 커밍아웃시키면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이성애자가 대의하고 있던 상황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사실상 누구도 서로를 대의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에 대한 공동의 연대책임을 인식하는 ‘연대’의 기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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