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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조원제, 총 대신 책을 잡다

등록 2007-10-05 00:00 수정 2020-05-03 04:25

후배 조정래가 모델로 삼은 박현채…빨치산에서 진보적 경제학자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조정래의 대하소설 에 등장하는 빨치산 부대의 소년 전사 ‘조원제’의 실제 모델이 박현채 선생이라는 사실은 웬만큼 알려져 있다.

지난해 6월 박현채 선생 10주기를 맞아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에서 엮어낸 에는 조원제라는 이름이 탄생한 일화를 전하는 조정래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박현채의 광주서중(현 광주일고) 후배로 인연을 맺은 조정래는 을 한참 써내려가던 중이던 어느 날 출판사에서 그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조정래는 서울 충무로 중부경찰서 근방에 있던 박현채 선생의 연구실로 찾아가 증언을 듣는 한편으로, 지리산 준령을 같이 넘나들며 빨치산의 실상과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이는 후반부를 이루는 빨치산 이야기로 태어났다.

“내 이름? 긁어 부스럼 아닐까?”

박 선생의 경험담을 기록해나가던 어느 날 조정래는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선생님이 겪으신 일을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에 등장시키면 어떨까요?” “그려? 그것도 괜찮허겠제.” “그런데…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내 이름? 나야 영광이지만, 그거 긁어 부스럼일지도 몰르는디? 글안해도 주목허고 있다는 소문인디 조심해야 써.” 빨친산 경력자에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자신을 잘못 다뤘다가 후배가 치도곤을 당할 수 있다는 염려의 뜻이었다. 조정래는 며칠 궁리 끝에 애정과 신뢰의 표현으로 ‘박현채’를 대신하는 성을 자신의 성 ‘조’로 정하고, 함안 조씨 항렬에서 ‘래’보다 한 계단 높은 ‘제’를 따왔다. 나머지 한 자는 ‘빼어난 빨치산 박현채’라는 뜻을 담은 으뜸 ‘원’자로 삼았다.

박현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빨치산 경력은 1950년 인민군 퇴각 직후였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이 된 그는 1952년 8월 체포될 때까지 지리산, 무등산, 백아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는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탄광노동자들의 시위를 보고 나서 민중의 편에 서서 살기로 결심했다고 훗날 술회한 바 있다. 빨치산 경력에서 진보적 경제학자, 변혁 운동가로 이어진 그의 삶의 궤적은 태생의 바탕에서 비롯된 바 컸던 셈이다.

체포된 해에 석방된 그는 2년 뒤 전주고 3학년에 편입했으며 이듬해인 195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기세문 광주전남 양심수후원회장은 박현채 추모집에서 “광주서중 1학년 때 경제학을 전공한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경제학,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게 됐던 것”이라고 전했다. 광주서중은 일제시대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원지로 진보적 사상을 가진 교사들이 많았고, 이 학교 출신으로 경성제대(현 서울대)에 진학해 수학의 천재로 이름을 떨쳤던 박재양 선생은 철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 학생들에게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평탄할 수 없었던 연구 활동

빨치산 생활을 함께했던 이태식 대장의 바람에 따라 민중을 위한 학문, 민중의 편에 선 학문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나선 그의 삶은 순탄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난 1964년의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1970년대 말에는 불법 간행물을 빌려줬다는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뒤 평탄한 연구 활동은 불가능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줄곧 ‘재야 경제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보내야 했다.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로 이른바 ‘제도권’에 진입한 것은 군사독재 시대 마감 무렵인 1989년이었다.

그는 제도권 진입 전에 이미 ‘민족경제론’으로 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와 온몸으로 부딪치며 왕성한 연구 활동을 이어오던 그는 1995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며, 천안공원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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