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앞둔 김수행 교수, ‘왼쪽’ 경제학의 위기를 논하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진은 모두 33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30명을 비롯해 32명이 영미식의 ‘주류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주류 경제학의 대척점에서 세계 경제 학맥의 한 축을 맡아온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는 딱 1명! 생전의 정운영 선생이 “우리 주변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정치경제학(마르크스 경제학)을 개척한 선배”라고 불렀던 김수행(65) 교수다.
“아직 학생들의 수요는 많다”
서울대 경제학 교수진 분포도를 자라나는 아이들에 견주면 지독한 ‘편식’ 상태요, 리영희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32 대 1의 우편향 날개를 단 ‘기형적인 새’ 모양이다. 그나마의 한 자리도 곧 주류 경제학으로 채워질 처지에 빠져 있다.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둔 김수행 교수 후임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가 뽑힐 가능성이 낮아진 것이다. 정운찬 교수를 비롯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은 9월5일 전체회의를 열어 “2008학년도 신규 교수 채용과 관련해 교수 1명을 채용하되, 대상을 (전공을 특정하지 않고) ‘경제학 일반’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뽑아야 한다는 김 교수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교수회의 직후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시종 특유의 웃음 띤 표정을 잃지는 않았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착잡함까지 감출 수는 없는 듯했다. 그는 “회의에서 결정된 규정에는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도 선생(교수)들 성향으로 보아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제하려는 의도와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경제학 전공자들의 전반적인 저변이나 채용의 칼자루를 쥔 교수들의 학문적 배경으로 보아 ‘경제학 일반’은 곧 우편향의 주류 경제학을 뜻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공 분야를 특정할 경우 선택 폭의 제약으로 아예 못 뽑을 수 있다는 학교 당국의 설명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서울대에만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는 박사 과정 연구자가 9명에 이른다는 점에서다.
‘왼쪽’ 경제학의 싹을 자르든, ‘오른쪽’ 경제학의 줄기를 더 무성하게 키우든 논란을 가름할 최종적인 관건은 역시 교육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달려 있을 터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김 교수는 “아직 학생들에게 (소식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며 이렇다 할 반응은 없음을 내비쳤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도 2학기 수강신청 현황표를 보여주며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는 여전히 많다”고 했다. 마르크스 경제학 학부 강의 세 과목 중 김수행 교수의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에는 100명이 수강을 신청한 것으로 돼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정상준 조교(박사 과정)는 “전필(전공필수)을 뺀 선택과목 중에선 제일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같은 과목에 지난해 2학기에는 41명, 올해 1학기에는 46명이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점점 절박해지는 취업 문제 등을 감안할 때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싸늘하게 식었을 것이라는 대학 담장 밖의 예상은 오해였던 것일까?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하에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비정규직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문제가 많은데, 주류 경제학에선 이런 걸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선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에 대해 가르치니까….”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대목에 이르자 열기가 느껴졌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25년, 4분의 1세기다. 그 결과가 뭐냐. 전쟁, 제국주의적 착취, 전세계적 빈부격차에 노동자들 생활은 열악해지고 사회보장제는 무너진다. 자본주의의 해악인데, 주류 경제학에선 이를 전혀 다루지 않고 시장에 맡겨놓으면 다 잘된다는 식이다. 새로운 걸 들을 수 없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 조교는 “학생회와 동아리가 망하고 나니까 (학생들로선) 사회에 대한 불만과 고민을 풀 데가 (마르크스 경제학 강좌 말고는) 마땅히 없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의 폐해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마르크스 경제학계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김 교수는 주류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경제학 분야에서도 유행을 좇는 경향이 많았다고 진단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학문의 자유가 풀리고 이 번역 출간되면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다 얼마 뒤 소련이 붕괴하고 사회주의권이 무너지자 이제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하는 경향이 많았다. 우리나라 학문 풍토에선 차분히 앉아 평생 연구한다는, 그런 게 없다.”
김 교수는 이를 ‘기본’에서 벗어난 사이비 마르크스주의가 판을 친 데서 비롯된 폐해로 해석한다. “(1970~80년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소련, 저건 사회주의도 아니고 학문도 엉터리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경제학 논문에 ‘브레주네프(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게 나와야 되냐고. 말이 안 되지. 국가가 권력을 다 잡고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시키는 그런 체제는 오래 못 간다고 봤다. 그런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일본에서 번역돼 국내에 수입된 거다. 소련이 몰락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원론에 충실한 글을 쓰고,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얘기했는지를 파고든 입장에선 놀랄 일이 아니었다.”
김 교수는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계의 취약성으로 ‘부실한 뿌리’와 함께 대안 논의의 부재를 꼽는다. “가난한 이들도 배려하는 평등한 복지사회로 가는 게 맞는데,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능력 있는 사람만 살 수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다.” 김 교수는 “이는 진보 진영 전체의 문제고, 마르크스 경제학의 과제이기도 하다”며 “마르크스 경제학이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들춰내는 데는 기여했지만, 어떤 식으로 대안을 마련하느냐 하는 큰 논의를 못한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여기에 현 단계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웃도는 비정규직을 노동운동에서 아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포괄하지 못하면 노동운동은 다 죽는다. 노동운동의 민주화랄까, 참여 같은 게 절실하다. 운동 진영의 상부 관료층이 밑(현장)의 사람들을 같이 참여시키는 노력을 많이 안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에 대한 반발감이 있는 듯하다.”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계를 비롯한 진보 진영 전체의 숙제로 ‘대중 조직화’를 든다. 진보 진영의 능력이 부족한데, 능력은 결국 대중의 마음을 잡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이게 옳다, 맞다’, 이렇게 해서 불이 붙고 같이 해나가는 건데, 우리의 대중 조직은 취약하다. 비정규직의 정치세력화가 부족하다. 대중을 각성, 참여시키는 걸 진보 진영에서 해내야 한다.” 그가 오세철 교수(연세대) 등과 더불어 사회과학대학원(cafe.daum.net/ReturnMarx)을 꾸려 학교 밖에 마르크스 강좌를 따로 개설해 ‘교육운동’을 벌이고 있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서울 삼각지 근방의 한강로1가에 강의실을 두고 있는 사회과학대학원은 올 3월 첫 학기 강좌를 마련해 교사, 노동운동가, 문학인 등 50명을 대상으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본 노동 문제, 역사, 한국경제론을 강의했다. ‘의 현대적 해석’ ‘정치경제학’ 등 모두 7개 강좌를 마련한 2학기 수업은 9월10일 시작됐다. 김 교수는 퇴임 뒤에는 사회과학대학원 일에 전념할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사회’ 위한 논문집 출간 예정
김 교수는 올 11월22일로 예정된 정년퇴임식에 맞춰 논문집을 내놓을 예정이다. 제자들과 함께 집필한 원고는 이미 서울대 출판부에 넘겼으며, 제목은 로 달았다. 여러 나라의 사례를 연구해 ‘새로운 사회’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선 어떤 기반을 갖춰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 16개 논문이 담기게 된다고 했다.
국내 대표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한국 사회는 산업화가 많이 진행된 나라다. 공장에서나 사회에서 주축은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좀더 결합을 잘해서 자본가 계급과 공동으로 경영도 하고, 정치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 사회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따라서 스웨덴 같은 복지사회에선 배울 게 많지만 미국을 따라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한국 사회를 미국처럼 만드는 과정으로 여겨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현재 국내 대학에 정규 교수로 재직 중인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는 그 수를 세는데 열 손가락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적다. 마르크스 경제학계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김수행 교수의 공백마저 주류 경제학으로 채워진다면 학문적 균형추는 한쪽으로 더욱더 쏠리게 될 것이다. 김 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을 후진은 결국 끊기고 마는 것일까?
▶김수행 교수 약력=1961년 대구상고 졸업, 1967년 서울대 경제학 석사, 1972~75년 한국외환은행 런던지점 대리, 1982년 영국 런던대 경제학 박사, 1982~1987년 한신대 무역학 부교수, 1989~1994년 서울대 경제학 부교수, 1994~2008년 2월(퇴임 예정) 서울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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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시작을 1776년 애덤 스미스의 저술로 잡는 데는 학계 안에서 별 이견이 없다. 스미스의 이론은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자유경쟁 시장에 맡겨두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자동 조절된다는 자유방임주의의 뿌리로, 흔히 ‘고전파 경제학’으로 불린다.
스미스에서 비롯된 고전파 경제학은 거의 100년 동안 독점적인 세력을 행사해오다가 1870년을 앞뒤로 강력한 두 조류에 의해 발전적으로 해체된다. 한편으로는 한계효용의 개념을 앞세운 ‘신고전파 경제학’, 다른 한편으론 1867년 1권 출판으로 상징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비판에 의해서였다.
시민혁명을 거친 뒤인 1870년대 사회적 분위기에서 기존 질서를 옹호하려는 처지에선 지주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해 대립적 경제 주체들의 구성 위에 바탕을 둔 고전파 경제학이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비계급적’ 관계를 내세우는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변신하는 추세를 적극 지지했다. 반면,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입장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사이의 모순을 더 분명하게 강조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기울었다.
자유방임주의 전통은 1930년대 대공황 뒤 ‘케인스 학파’의 반격을 받았고,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여러 변종이 나타났지만, 경제학 사상의 전반적인 흐름은 애덤 스미스에 뿌리를 둔 영미식의 주류 경제학과, 이와는 터전을 완전히 달리하는 비주류의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대별된다.
현대 경제학에서 이처럼 큰 흐름을 형성해온 마르크스 경제학이 한국에선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 ‘수입 금지’ 품목이었다. 1989년 김수행 서울대 교수의 번역판이 합법적으로 출간된 뒤에야 새로운 전기를 맞았으며, 1991년 소련 붕괴 전까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학습 열기는 뜨거웠다.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권 몰락, 1997년 외환위기 뒤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 득세로 우리나라 학계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터전은 매우 협소해졌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교수로 채용하고 있는 대학이 서울대, 연세대, 경상대, 목포대, 동아대, 고려대, 충남대, 전남대 등 8개 대학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1990년대 이후 신규 채용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정성진 경상대 교수는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도 상반된 시각을 동시에 접하고 이해하는 게 사회현상을 다루는 경제학에선 필수적”이라며 국내 경제학계의 ‘편식’ 현상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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