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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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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타협 논쟁] ‘삼성공화국’에서 사회협약이라니…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불가능한 타협보다 경제민주주의와 재벌 개혁을

장하준 교수를 중심으로 일부 경제학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현실적 대안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제안하고 있다. 노동과 자본이 정부의 중재 아래 타협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고리는 재벌과 노조다. 재벌은 소유권을 보장 받고 높은 세금과 고용 보장을 감당한다. 대신 노조는 과도한 인금 인상 요구를 자제한다.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미래를 위한 장기적 투자를 독려한다. 그러나 삼성 비자금 파문이 온 나라를 뒤흔드는 지금, 이 길을 가기 위해선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재벌은 대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재벌이 경제정책을 주무르는 나라에서 대타협은 가능한가. 은 불가능한 타협 대신 재벌 개혁에 나서자는 주장과 대타협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상반된 주장을 싣는다. 한국 사회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논의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편집자

▣ 조진한 진보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국의 개혁적 인사 중 일부가 재벌과의 사회 대타협을 통한 복지국가를 주장하고 있다. 그중 다수가 스웨덴을 좋아한다. 이분들의 머릿속은 매우 깔끔하다. ‘깨끗한 재벌 가문이 차등의결권을 기반으로 다수의 계열사를 지배해, 선단식 경영으로 국부를 창출하고 많은 세금을 낸다. 이 재원으로 복지국가를 형성한다.’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세상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우선 재벌의 승계 과정이 깨끗하지가 않다. 온 나라를 뒤흔든 삼성 비자금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스웨덴 재벌 발렌베리 가문이 후손에게 전환사채(CB)를 통해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지배권을 넘겨주고, 이를 입막음하기 위해 검사와 정치인에게 검은돈을 뿌렸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형태의 봉건적 재벌이 지배권을 보장받고 그 대가로 차별 없는 경제와 복지사회로의 진전을 위해 협조한다는 것은 상상 속의 동화일 뿐이다.

스웨덴식 타협은 노동의 힘 때문

사실 스웨덴식 사회 대타협은, 노동계급이 재벌의 기업 소유를 부정하고 노동자들이 직접 경영하겠다는 이른바 ‘사회주의 프로젝트’를 철회하면서 생겨난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정권을 장악한 스웨덴 사민당과 노조는 ‘마음만 먹으면’ 발렌베리의 계열사들을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직접 소유하는 것보다 재벌에게 그 기업들을 맡겨놓고(일종의 위탁), 대신 높은 소득세를 거둬들여 복지사회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렇듯 사회 대타협의 기저에는 국민에게 신뢰받는 강력한 노동정치의 힘과, 투명경영을 할 수 있는 근대적 형태의 자본가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삼성은 대를 이어 무노조 경영을 유지한다. 또 노동자들이 해고의 위협이 두려워 스스로 조직을 만들려 할 때, 노동자의 휴대전화를 도청하고 미행하고 회유하고 탄압했다. 나아가 삼성은 공화국의 주인 행세를 하려 했다. 역대 대통령 후보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재벌체제의 영속화를 기도했다. 민주정부 들어서도 고위 관료 인선에 개입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해를 ‘싼 비용’으로 관철하려 했다. 이것을 ‘보험’이라고 부르든 ‘떡값’이라고 부르든 그 효과는 동일하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봉건적 상속이다. 모든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가 ‘X파일’(이학수 녹취) 사건이며 ‘떡검’(떡값검사) 스캔들이다. 우리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최대 주주든 대주주든 능력이 있으면 경영을 하라. 단, 소유한 만큼만 지배하라는 것이다. 총수들은 1%에도 못 미치는 지분을 갖고 수십 개의 계열사를 지배한다. 가공자본의 확장을 통한 선단식 경영은 마치 수많은 구축함을 지휘하는 항공모함과 같다. 그러나 이 모함은 철판이 취약해 총알 한 방으로도 가라앉을 정도다. 김용철의 폭로가 그러하고, 이용철의 고백이 그러하다.

논리적으로 풀어보자. 사회 대타협은 사회협약(social compact)을 말한다. 즉, 계약이다. 부동산 계약에서도 계약서가 중요하다. 법적 유지 때문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그 집을 살 능력이 있는지 여부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부르는 가격 흥정이 얼추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것을 사회협약으로 옮겨 놓아보자.

사회거래에서 힘은 시장에서 자산과 같다. 즉, 재벌(자본)의 힘과 노동의 힘이 얼추 맞아떨어져야 거래가 형성되고 계약서가 교환된다. 여기서 거간(정부나 정당)의 역할은 2차적이다. 이것이 우리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한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회 대타협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러한 전제조건을 무시한다. 빨리 거래를 하라고 부추긴다. 장하준 교수는 재벌들의 ‘경영권’을 안정시켜주고 ‘투자, 고용, 노사관계, 복지국가’를 요구하는 것이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순진하게만 느껴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재벌이 왜 사회협약에 나서겠나?’ 현재에도 4% 지분(총수 지분은 1% 미만)으로 10배에 가까운 투표권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그룹 경영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재벌이 약한 노조를 대상으로 왜 타협을 하려 하겠는가? 또 삼성화된 정치권력이 존재하는데 굳이 왜 사회협약에 서명을 하려 하겠는가? 오히려 설익은 거래는 재벌에 영속적인 기업지배권(차등의결권, 황금주 등)만 부여하고, 노동과 국민에게는 고용창출이라는 추상적인 선언만 돌아갈 공산이 크다(이런 측면에서 삼성과 전경련의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론은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대국민적 협박과 다름없다).

이건희 회장이 스웨덴에 간 적이 있었다. 발렌베리로부터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돌아왔고 스웨덴 학습계획은 파기됐다. 왜? 알고 보니 스웨덴의 재벌은 너무 많은 세금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유보다 2배 정도 지배권을 인정하는 차등의결권이 매력적이었겠지만 그것은 일방적으로 받은 특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민당과 주고받은 거래의 결과였고 엄청난 소득세와 노동과의 공동경영, 그리고 일자리 안정이 그 비용이었다.

거래에는 신뢰가 있어야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역사적·사회적 배경 때문이다. 발렌베리 재단은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지분 21.4%(의결권 46.1%)를 보유한 최대 주주이다. 소유기업의 이윤은 배당을 통해 인베스터로 모이고 이는 다시 재단으로 집결된다. 재단은 수익금의 대부분을 스웨덴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스웨덴 사회 전체로 환원된다. 이를 어찌 삼성과 비교할 수 있을까? 거래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사회 대타협의 배경에도 게임을 파기하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한다.

물론 사회 대타협을 강조하는 장하준 교수 같은 분도 현 삼성체제에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그분들이 할 일은 대타협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기반을 위해 삼성공화국의 어두운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복지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한국에서 사회협약을 위한 대타협의 조건은 형성되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해서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삼성 비자금 사건이 투명하게 밝혀지도록 올바른 특검을 세우고, 죄진 자는 감옥에 보내 부정 행위에 대한 사회적 벌칙이 있음을 만인에게 보여줌으로써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후 정신 차린 재벌 총수가 노동을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는 산별(전국) 노조가 전경련과 동등한 힘을 갖게 되면 서로가 사회협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가능하지 않은 타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경제민주주의를 위한 첫걸음으로 재벌을 철저히 개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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