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는 한 이단아의 사색의 기록, 데릭 젠슨의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미리 ‘경고’를 해두는 게 도리일 듯싶다. 임산부나 노약자, 마음이 여린 독자들께선 이쯤에서 읽기를 멈추시라. 이 말은 만 18살 이하 청소년 독자들께도 해당된다는 점을 덧붙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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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미국 조지아주 발도스타에 살던 흑인 여성 매리 터너의 남편이 백인 남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단지 적절치 않은 장소에, 적절치 않은 시간에, 적절치 않은 피부색을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죽었다. 임신 8개월이었던 매리 터너는 남편이 살해당하자 복수를 맹세했다. …수백 명의 백인 남녀 무리가 그녀에게 ‘교훈을 가르쳐주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발목을 한데 묶어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옷에 기름을 끼얹은 다음 불을 붙였다. 옷이 타서 그녀의 몸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돼지 잡는 칼로 그녀의 배를 갈랐다. 태아가 땅으로 떨어져서 울음소리를 냈지만, 누군가가 아이의 머리를 발로 짓이겨버렸다. 그 다음 매리 터너를 총으로 쏘았다. 한두 발이 아니라 수백 발이었다.”
‘도발적’이란 말보단 ‘충격적’이란 표현이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데릭 젠슨 지음·이현정 옮김, 아고라 펴냄)은 책 머리에서부터 이렇게 ‘도발’과 ‘충격’을 오가며 ‘불편한 진실’을 쏟아낸다. 아니 들이댄다는 편이 맞겠다. 계급착취와 인종차별, 학살과 성차별, 성폭력과 인종학살, 아동학대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집단 린치,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과 생태파괴에 이르기까지 지은이가 열거하는 ‘증오범죄’ 목록은 끝이 없다. 예를 들어 책 37쪽부터 41쪽까지를 지은이는 1990년대 미국에서 경찰의 과도한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단으로 채우고 있다.
지은이는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건 ‘증오집단’이라고 규정한다. 간혹 범죄를 저지른 물적 집단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들이 저질러온 범죄까지 뿌리 뽑히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덜떨어진’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모임인 ‘KKK’가 와해됐다고 해도, “그들의 폭력을 촉발한 충동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이유는 뻔하다. “폭력이 일어나게 한 사회적 조건”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한 집단의 특권이 다른 집단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면 특권층 집단은 그러한 특권 중 일부를 잃어버리는 데 대해 위협을 느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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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21개 장으로 나뉘어 있다. 일기나 블로그처럼 그날그날의 짧은 단상들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거짓된 진실’을 파헤쳐나가는 지은이의 숨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그럴 때마다 지은이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진다.
“우리는 어쩌다가 하나의 대륙을 노예화하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다른 인종 전체를 없애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왜 타자들을 전부 짓밟고 자기 뜻대로 하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우리는, 간단히 말해,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을까? 애초에 우리는 왜 이런 짓을 하기를 원했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을까?”
지은이는 이 책을 “잔학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자,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라고 짐짓 힘을 준다. 하지만 그보다는 고뇌하는 한 이단아의 자기 성찰과 끊임없는 사색의 기록물로 읽힌다. 산더미 같은 범죄 기록을 낱낱이 제시하며 독자를 채근하지만, 지은이가 날선 기소장을 읽어 내려가는 검은 법복의 검사로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깨어 있으라”고 외치는 ‘광야의 선지자’를 연상시킨다는 편이 맞겠다. 지은이는 이렇게 강조했다.
“증오집단과 일반인들 사이의 심연은 흔히 짐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넓지는 않다. 증오집단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 문화의 부드럽고 허연 속살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우리의 행동 방식에 대한 고통스러운 진실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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