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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 건물, 이름 짓기 어려워

등록 2007-10-12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국가별·파벌별 자존심 싸움으로 신축된 두 동의 이름은 D-4, D-5인 채로</font>

▣ 브뤼셀(벨기에)=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신축된 유럽의회 건물 이름을 두고 의원들 사이에 신경전이 한창이다. 지난 2004년 유럽연합(EU)이 25개국으로 급팽창하면서 유럽연합의 각 기관들은 공간 부족으로 큰 몸살을 앓게 됐다. 그래서 부족한 공간을 늘리기 위해 여러 건물을 신축하기로 했는데, 유럽의회도 예외 없이 건물 두 동을 새로 지었다. 임시로 이 건물들에 붙여진 이름은 D-4와 D-5. 본관 이름이 ‘알티에로 스피넬리’인 것에 비하면 D-4, D-5는 분명 멋없는 이름이다.

교황, 만델라, 대처, 빌리 브란트…

유럽연합의 건물들은 대부분 유명인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반파시스트이자 유럽 통합에 공헌한 ‘알티에로 스피넬리’ 빌딩(유럽의회 본관), 벨기에의 인문주의자 이름을 딴 ‘유스투스 립시우스’ 빌딩(유럽 이사회), 카롤링거 왕조의 2대 국왕으로 서유럽을 통일한 ‘샤를마뉴’ 빌딩(집행위원회 일부 입주), 벨기에 총리이자 유럽연합의 초석을 놓은 ‘폴 앙리 스파크’ 빌딩(유럽의회 반원형 건물) 등이 그런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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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의 새 건물 명칭을 둘러싼 신경전은 2005년부터 이미 예고됐다. 폴란드 출신의 몇몇 우파 의원들이 신축 건물의 명칭을 그즈음에 서거한 교황 바오로 2세로 짓자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들은 교황이 공산주의 종식에 이바지했고 이로 인해 유럽의 재통합이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들 주장의 일면에는 폴란드 민족주의가 숨어 있었다. 그러자 자유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의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교황은 유럽 통합에 실질적인 공헌을 한 인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유럽연합에서 종교적인 냄새가 나서는 곤란하다고 반박했다.

갈등이 심화되자 유럽의회는 최근 의회 내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새 건물의 이름에 대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이미 완공된 D-4 건물의 명칭으로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올로프 팔메’ 전 스웨덴 총리, ‘바츨라프 하벨’ 체코 초대 대통령, 현 폴란드 지도부인 ‘카진스키’ 형제 등이 거론됐고,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입길에 올랐다.

하지만 만델라 전 대통령은 유럽연합과는 별 상관이 없는 뜬금없는 인물인데다, 마거릿 대처는 유럽연합 노선에 항상 반기를 들었던 반유럽연합적인 인물이라 해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결국 가장 큰 지지를 받은 인물은 전체 조사자 중 32%의 지지를 받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사회당·1979~83)로 드러났지만, 이것이 그대로 채택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이 문제를 보도한 〈EU 옵저버〉는 유럽의회의 인사의 말을 인용해 “이름을 붙이는 데도 국가별, 파벌별 자존심이 걸려 있다”고 전하면서 “지금까지는 주로 정치적 다수파의 견해가 채택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의회(전체회의가 열리는 곳) 건물의 이름은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총리를 역임했고 오랫동안 스트라스부르의 시장을 지낸 ‘피에르 플리믈린’의 이름을 땄다. 이는 유럽의회 내 최대 파벌이자 중도우파 그룹인 기독민주당 그룹이 제안해서 채택된 것인데, 피에르 플리믈린이 기독민주당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정치적 혈통이 이름을 붙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명 부의장+6명 고문관 모여 회의 중

이 논쟁과 관련해 프랑스 녹색당의 제라르 오네스타 의원은 “두 건물 중에 적어도 하나는 신규 가입국인 동유럽을 대표하는 인물이 명칭으로 채택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놨다. 또한 “앞으로 계속 신축될 BD-4와 BD-5 건물에는 여성 이름이 채택됐으면 좋겠다”라는 견해도 밝혔다. 현재 새 건물의 이름을 짓기 위해 14명의 유럽의회 부의장과 6명의 고문관으로 구성된 회의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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