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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르는 여자를 고르는 남자들

교보문고가 ‘번따 성지’ 된 불편한 시대적 맥락들
등록 2026-05-21 22:19 수정 2026-05-26 07:47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연합뉴스


교보문고가 ‘번따’(번호 따기)의 성지로 부상했다. 서점이 이성적 만남의 목적으로 전화번호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따는’ 핫플레이스가 된 것이다. 관련 불편 신고가 잇따르자 교보문고 서울 광화문점은 최근 “소중한 독서의 순간이 낯선 대화나 시선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세요”라는 안내문을 걸어뒀다. 그러자 알라딘 중고서점, 다이소가 새로운 번따의 장소로 지목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번따 문화는 도시화로 인한 익명 만남의 확대와 개인용 휴대전화가 보급된 이후 꾸준히 있었다. 특히 서점이나 도서관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영화나 드라마 속 낭만적 인연의 클리셰였다. 하지만 지금의 서점 번따는 번따 자체를 목적으로 다수가 모이고 그 전략이나 후기를 인증하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맥락과 다르다.

개인화가 심화하고 친밀성이 자본화하면서 이성애는 전통적 방식과 다른 만남의 방식을 추구하게 됐다. 그 만남의 접점을 희소품 취급하는 시장이 확대됐다. ‘로테이션 소개팅’ 테마의 사업 성행도 이런 추세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 속에서 연애와 결혼에서도 최적의 효율과 최대의 가치를 뽑아내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피로감과 비효율을 느끼고 있다.(제1608호 참조) 대조적으로 서점은 ‘자연스럽게’ 만날 맥락과 장소를 제공한다.

지금 번따는 남자, 여자에게 모두 만남뿐 아니라 자존감을 확보하는 상징이 됐다. 주로 남성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여자의 번호를 따는 데 성공했는가’(나아가 성관계까지 했는가), 여성들에게는 ‘한눈에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가’의 보증표로서다.(여성에게는 번따를 당하면 오히려 ‘만만해 보인다’는 모순도 공존한다.) 번따 강의가 팔리고 ‘번따룩’과 ‘번따 메이크업’이 인기리에 공유되며 ‘번따 당한 제품’ 콘셉트의 릴스(인스타그램 짧은 영상) 광고도 넘친다.

‘클래식 보러 가서 존잘 남친 생긴 썰’(139만 조회수) 릴스는 사실 클래식 취향을 기반으로 한 로테이션 소개팅을 홍보하기 위한 콘텐츠다. 그중 1500개 이상의 ‘좋아요’를 얻은 댓글은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클래식 전공인데요. 그런 일(존잘 남친 생길 일) 하나도 없고 (…) 괜히 망상병에 용기 생겨서 전번(전화번호) 따지 말고 그냥 문화생활만 하세요.” “‘엘리트 직장인’ 만날 수 있는 레전드 헌팅 성지 탐(TOP)5” 등의 릴스는 특정한 장소를 이성애를 위한 목적으로만 소비하고 있다.

‘교보문고 번따’ 관련 유튜브 릴스 갈무리

‘교보문고 번따’ 관련 유튜브 릴스 갈무리


그중 교보문고라는 장소는 특히 젠더적 관점에서 여성혐오적인 ‘조신함’의 상징으로 전유되는 것이 문제다. 서점에 있는 여성은 헌팅 포차나 클럽에 있는 여성과 달리 ‘참하고 순수해서’ 번따의 대상으로 지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여성들이 주로 읽는 책이란 일부 남성이 ‘믿고 거르라’고 말하는 페미니즘이나 퀴어, 장애, 질병권, 동물권 같은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공공장소에서 성적 호감에 기반한 만남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그 맥락을 사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이 문제다. 대형 서점 교보문고의 운영난 이야기는 매해 들려온다. 특히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수익뿐 아니라 창업가의 독서 진흥 이념을 위해 운영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종의 공공공간 역할을 맡고 있다. 광화문광장에서 시위를 치른 사람들이 교보문고의 화장실이나 정수기를 이용하거나, 약속 대기 시간 등을 보내기 위해 서점을 점유한다. 이런 오프라인 매장의 운영은 쿠팡이 책 배송 영역까지 진출하면서 악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책을 이용하며 손실된 재고를 출판사와 저자가 감당하기에 이런 대형 서점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장소의 아우라도 개인적 매력을 만드는 도구로 소비하는 시대다. 이성애 에로스 자본은 장소의 분위기를 페티시적으로만 ‘따며’ ‘독서 원주민 및 영세 출판계'를 밀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여 앞서 언급한 서점의 안내 문구를 정확히는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출판 생태계가 조성한 독서의 분위기를 이성애의 힙한 감성으로만 소비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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