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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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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방지법에 밀린 사상의 자유/ 유성민

등록 2004-02-12 00:00 수정 2020-05-03 04:23

[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국가안보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나?]

유성민/ 대전 보문고 3학년

국가정보원은 5·16 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가 생겨난 이래, 안기부니 국정원이니 하며 이름은 바뀌었으나, 첩보기구로서의 기능보다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많은 인명을 고통받게 한 부당한 권력의 시녀가 돼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민의 정부 때부터 안기부가 현재의 국정원으로 개칭되고, 그 부당함에 굴종하는 기능들에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 기조는 참여정부 때도 여전하여, 국정원장과 기조실장에 명백한 개혁성 인사를 단행하는 파격을 보여줬다. 이는 국정원의 업무를 국내용, 감시·탄압용이 아닌 정말 새로운 ‘해외 첩보기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최근 대체 어느 ‘참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국정원의 국내용 ‘힘’을 대폭 강화하는 테러방지법이 발의되었다. 9·11 테러의 영향으로 ‘친미’ 국가인 우리도 안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미국의 ‘애국자법’ 이후에 이 법을 시행하려는 움직임은 또 다른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론, 파병반대도 아니고 혼성부대 파병하는 게 ‘자주’인 나라를, 다른 나라가 어찌 보겠는가? 얼마 전 이라크에서의 한국인 피살은 아랍인들의 인식이 좋지 않음을 상징한다. 결국 감정이 나쁘고, 항의를 받되 제대로 받아줄 마음은 없기에 그들의 ‘최후 수단’인 테러만은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비단 근본주의 세력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세력이나 여러 단체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법은 국정원에 이 ‘방지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총련이나 극우보수단체의 우리들이 누차 보아온 과격시위들이, 지금과는 비할 수 없는 탄압을 받을 것이다. 탱크 점거 같은 ‘테러’는 방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는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고 당연히 막아야 한다. 의사표현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테러범들은 왜 테러범이 되어야만 했는가. 테러를 방지해야 한다고 무턱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그 점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테러범들의 심리엔 ‘피해의식’이 있다.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게는 미국에 의한 아랍인의 박탈감, 서방의 이슬람에 대한 모독 등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걸프전은 후세인이 미국에게 토사구팽당한 것이 한 원인이었고, 팔레스타인에서의 테러는 바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 아닌가.

앞서 지적한 한총련이나 극우단체들의 테러에 가까운 과격시위도, 바로 정상적인 의사표현은 터무니없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한총련의 시대착오성 이전에, 그들의 의견을 제대로 듣기 위한 시도를 우리 사회가 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사람을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맞는 게 아니라 무시당하는 것이다. “무시당하기보다 맞자”라는 과격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게 과연 누군가.

더구나 이 법은 개념 규정의 모호성 때문에, 자칫하면 평화적인 시위도 국정원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테러’가 될 수 있다.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고 미국의 부당한 만행에 눈물을 흘린 다음날, “당신은 반미시위로 사회불안을 야기했습니다”라며 수사 대상이 되는, 순식간에 테러범이 되는 어이없음을 생각해보라. 정당한 의사표현이 테러가 되는 게 인권침해가 아니고 뭔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때, 사람은 과격해진다. 그리고 분노가 치민다. 정권 보안을 위한 국가보안법으로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의 삶을 살아야 했던 많은 이들이 모두 테러범이란 말인가. 인혁당, 남민전, 민청학련, 많은 재야인사들…. 그들은 모두 법을 어긴 ‘반역자’들인가? 그들이 분노한 건 그들이 미쳐서가 아니라 사회가 미쳤기 때문이다.

일본은 공산당도 의석을 갖고 있다. 프랑스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공존하고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사회를 만든 뒤에, 그래도 테러가 나면 그때 테러방지법을 만들어도 늦지 않다. 과연 누가 ‘테러범’들을 만드는가. 국민의 정부 이래 국정원의 불필요한 힘을 없애겠다는 기조는 어디 가고 ‘제2국보법’을 만들어 테러범을 양산한다는 건가. 미국에의 테러는 바로 미국의 일방주의가 주원인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 불만계층에 ‘일방주의적’으로 대처한다면, 그들이 설사 테러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설득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테러방지법을 만들게 되면 테러를 정당화하여 더 많이 양산하게 될 것이다. 이게 ‘방지’인가?

바람은 옷을 더 힘있게 여미게 하지만, 햇볕은 발가벗고 수영을 하게 만든다. 강압적인 힘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강압적인 바람은 옷을 왕창 껴입은 뚱뚱한 모습만을 보여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합법적으로 받고, 설득되고 수용될 수 있는 따스함이 진정 아름다운 힘이다. 힘은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다운 힘은 있다. 겨울 해변보다 여름 해변의 수영복이 더 섹시한 법이다.

[ 칭찬과 아쉬움 ]

‘국가안보와 사생활의 자유, 그 균형점은 어디인가?’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는 평소에 비해 참여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글의 수준도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지 못했다.
이번주에는 예컨대 고정 기고자인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이 뽑혔다. 그의 글은 다른 글에 비해 국가안보와 사생활의 자유가 충돌하는 양상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미국의 9·11 사태, 한총련 시위 등을 예로 들면서 테러방지법이 담고 있는 인권침해 소지를 나름의 관점에서 촘촘히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한 역사에 글의 무게가 실려 있다. 정작 국가안보와 사생활의 자유가 만나는 ‘균형점’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는 빠진 것이다. 다양한 소재를 끌어들여서인지 주장도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이 부족하다. 유성민 학생은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다양한 소재를 품으면서도 주장의 명확성을 잃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천고 최진헌 학생은 테러방지법의 인권침해 가능성에 무게를 둔 글을 보내왔다. 테러방지법의 각종 조항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인권침해 가능성을 따져본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최진헌 학생 또한 ‘테러방지법’ 비판에 빠져, 정작 토론 주제인 국가안보와 사생활의 자유가 충돌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술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예컨대’에 처음 글을 보낸 김포 통진종합고 안성길 학생은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사생활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 그는 논술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서론·본론·결론이 제각각의 내용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논술글은 하나의 ‘구성물’인 만큼 각 단락과 서론·본론·결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하나의 주제로 모아져야 한다. 평소 독서와 신문 읽기 등을 통해 다양한 논술 주제에 대한 지식도 쌓아두어야 한다. 앞으로 꾸준히 글을 쓰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글쓰기 능력이 향상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주는 불행히도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와 발랄한 상상력이 부족한 한주였다. 다음주에는 여러 학생들의 건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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