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되찾자’ 학계 움직임 본격화… 동북아 공동의 역사인식이라는 주장도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지난 4일 오후 고려대 인촌기념관, 고구려사연구재단(가칭·위원장 김정배 고려대 교수)의 설립추진총회가 열렸다. 3·1절에 맞춰 발족할 이 재단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학계와 정부가 마련한 국가적 차원의 학술센터다. 지난해 7월 처음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고 연말에 본격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된 데 비하면 꽤 발빠른 대응이다.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둘러싼 격론
그런데 ‘고구려를 되찾자’는 움직임의 결실인 이 자리에서는 연구재단의 성격과 연구 범위 등을 둘러싸고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우선은 당면 현안인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학문적 규명에 역량을 집중하자는 의견인데, 고구려사연구재단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최광식·한규철)와 ‘한국 고대사학회’(회장 이문기) 등의 학술단체가 이런 입장을 대표한다.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서 고구려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며, 고구려사란 말을 빼면 연구센터를 유지해갈 추진력을 계속 얻기 힘들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동북아시아 역사를 포괄하는 연구기관을 설립해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미래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연구와 정책 대안을 마련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연대’(공동대표 서중석·이남순·이수호)나 한국 근현대사 전공 학자들, 중국사, 정치학자 등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동아시아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연구센터는 동북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두고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독립적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날 토론은 결론을 내지 못했고, 추진위는 소위원회를 구성해 최종안을 확정하기로 문제를 잠시 덮었지만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기 위해 정부가 해마다 1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한 이 기구에 대한 논쟁은 의외로 골이 깊다.
‘고구려사 연구재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격론은 새해 초부터 동북아 국가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전쟁’의 한 단면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가 진행형인데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새해 첫날 야스쿠니신사를 전격 참배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의 독도우표 발행 정지를 요구하며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해 한국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또 지난 1월15일에는 중-일간 영유권 분쟁을 빚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상륙하려던 중국 어민들을 일본 해상자위대가 물대포로 공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격렬한 ‘전장’에서 삼국의 네티즌들은 상대국의 해당 사이트를 무차별 공격해 마비시키는 새로운 ‘전투’를 벌였으며, 국내에서는 ‘고구려는 중국에 뺐기고 독도는 일본에 뺐기고’ ‘제2의 나당전쟁’ ‘동북아 역사 삼국전쟁’식의 위기의식이 강해지고 있다.
민족주의에 민족주의로 대응?
이 중에서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구중심
(www.chinaborderland.com)이 국가 중점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로 다루면서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했던 모든 민족은 당연히 중국인이며 중국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현대판 중화주의라는 점에서 논쟁의 핵이 되고 있다. 동북공정이 알려지자 학계에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공동대책위’ ‘고구려연구회’ ‘한국고대사학회’ 등이 학술회의·강연 등에 나섰고, 흥사단·광복회 등 시민단체들도 ‘고구려사 지키기 범민족시민연대’를 결성해 1천만명 시민운동을 벌였다.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라는 민간단체는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회(ICOMOS)에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대량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쟁점이었던 중국쪽 고구려 유적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것이라는 위기감은 최근 중국과 북한의 동시등재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중국이 동북공정을 계속 추진하고 동북지방 고구려 유적에 대한 한국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등 불씨는 여전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민족주의에 한국 역시 민족주의로 대응하려는 시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풀어야 하며, “고구려사는 한국 것”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국내용’ 연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지역협력체 구성이라는 세계적 추세 속에서 한·중·일이 동북아 공동의 역사인식과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와 미래라는 관점에서 고구려사의 위상, 한반도의 역할 등을 포괄적으로 보자는 논의도 활발하다.
이신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중국은 동북 지역의 정비와 더불어 사전에 한반도 통일 이후 국경지역 불안 가능성에 대비하고 동북아에서 일본과의 주도권 경쟁, 미국과의 경쟁 관계까지도 염두에 둔 현실논리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일본의 역사 왜곡과 우경화 또한 같은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구려 연구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으며, 동북아시아라는 넓은 틀 안에 놓고 한-일·한-중 관계, 정치·외교 문제, 통일 이후의 국경분쟁, 변화하는 세계 체제 속에서 한반도의 위치 등 다양한 문제들을 함께 검토하고 미래까지 대비하며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고구려 문제가 불거지면 급히 고구려연구재단를 만들고, 발해 문제가 나오면 다시 발해연구재단을 만들고, 러시아와 분쟁이 생기면 또 다른 재단를 만들 것이 아니라 한국사·중국사·일본사·정치학·외교학 등 다양한 연구자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여해 총체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 고구려사와 독도 문제가 삼국간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충돌로 흐를 가능성에도 경고하고 있다.
윤휘탁 동아대 교수는 겨울호에서 “‘학문적 돌연변이’인 동북공정이 주변 국가들로부터 역사적 당위성을 얻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동아시아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제는 일본의 우경화 못지않게 중국의 국가주의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도 절제되지 않은 ‘애국적’ 행위로 대응한다면 또 다른 갈등을 일으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또 설립 준비 중인 고구려사연구재단이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의 참여를 배제하고, 정부가 단기간에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과 겹치면서 자칫 막대한 정부 예산을 염두에 둔 밥그릇 싸움, 학파들 사이의 파벌주의적 세력 다툼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아시아 공동체로 가는 먼 길
한편 이번 사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족주의적 충돌로 이어지면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구상은 좌절된 것인가”라는 큰 질문도 던지고 있다.
국내에서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좌장 격인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사태는 경제적인 동북아 공동체는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국가적 ‘편견’을 넘어서는 인식과 소통의 공동체는 생각보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애물’이며 일종의 ‘예방주사’다. 이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위기감도 느끼지만, 이전 같으면 민족사를 강조하는 목소리만 있을 텐데 이제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자는 목소리도 상당히 힘을 얻고 있어 비관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백 교수는 또 “고구려에 대한 문헌·고고학 자료의 대부분은 중국이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고구려사를 정말 ‘지키려면’ 중국·대만·미국·일본 학자들까지 참여시켜 공동연구나 학술대회도 열면서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공동의 대화틀을 만드는 데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진 것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른 중국위협론이 한국인들의 잠재의식을 건드려 역사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위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동북아 국가들이 급변하는 국제적 환경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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