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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서열화에 의한 교육 불평등/ 정원일

등록 2004-02-19 00:00 수정 2020-05-03 04:23

[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학력 · 학벌 세습은 불가피한가?]

정원일/ 전주 상산고 1학년

우리 속담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가난한 집안의 수재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심심찮게 쓰이곤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교육이 불평등을 해소하기는커녕 계층이동을 막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최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발표한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라는 제목의 연구조사에서 나타난, 이른바 ‘강남 8학군’ 출신 수험생의 서울대 입학률은 전국 평균의 2.5배, 고소득 전문직 자녀의 서울대 입학률은 일반 가정의 16배라는 충격적인 결과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과거와 비교해볼 때 눈에 띄게 증가한 수치로서, 우리 사회의 학력·학벌 세습이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력·학벌 세습이 더욱 고착화된다면 부의 세습을 낳아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더욱 심화시켜 사회 구성원들간의 위화감을 조성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문제의 책임이 고교 평준화 제도에 있다는 평준화 폐지론자들의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중학생들의 과도한 입시 경쟁을 막고 모두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고교 평준화 제도는 올해로 시행 30여년째를 맞고 있다.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지적하는 수많은 평준화 폐지론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교 평준화 제도는 우리 사회의 교육 기회 불평등을 해소하고, 이른바 ‘명문고’와 ‘비명문고’ 사이의 위화감도 없애는 등 많은 순기능을 해왔다. 또한 학생들의 전체적인 학업 성취도도 오히려 높아졌음을 나타내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어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졌다는 일부의 주장을 무색케 하고 있다. 이렇듯 고교 평준화 제도가 학력·학벌의 세습을 낳고 있으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사회의 학력·학벌 세습을 고착화하는가?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로 고교는 평준화되었지만 대학은 엄격히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능력을 갖추었는가’보다 ‘무슨 대학을 나왔는가’가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기형적인 사회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은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한 전쟁터로 변해버린 지 오래고, 사교육에 쏟아붓는 돈이 한해 수십조원에 달할 정도로 교육 현실은 왜곡되었고 공교육은 황폐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학력·고소득의 부모를 둔 자녀가 더 많은, 더 비싼 사교육을 받게 됨으로써 그들 대다수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실탄을 많이 가진’ 자가 승리하는 이치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결국 해법은 대학 서열화 타파에 있다. 쉽게 말하면, 대학에도 과감히 평준화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고교 평준화가 중학생들의 고교 입시 경쟁을 해소했듯이, 대학 평준화는 고교생들을 대학 입시 지옥에서 구해내고 망국적인 사교육병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낼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주요 국공립 대학을 통폐합하여 하나의 국립대학에 여러 캠퍼스가 존재하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사립대학도 비슷한 개혁을 단행해 일류대에서 삼류대, 수도권 대학에서 지방대학으로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또한 대입 수능을 독일의 아비투어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 비슷한 성격의 ‘대학입학 자격고사’로 전환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능력을 갖춘 학생이면 누구나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교육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소득의 누진세율 강화, 사회보장제도 확대 등을 통해 어떤 직종이든지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고루 분배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구조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는 현실을 바로잡고, 자기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대학에 입학하고 진로를 결정하는 바람직한 풍토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세습되는 ‘현대판 골품제’가 없어지고, 사회 구성원 전체가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하며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사는 살맛 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 정원일(전주 상산고 1학년)

[ 칭찬과 아쉬움 ]

역시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잘할 수 있는 법이다. 학생들 자신의 이야기인 “학력·학벌 세습은 불가피한가?”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 많은 학생들이 글을 보내주었고, 글의 수준도 높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력·학벌 세습의 원인으로 대학 서열화를 꼽았다. 수준 높은 여러 글들 가운데 전주 상산고 정원일, 부평고 김호빈 학생의 글을 놓고 고심했다. 정원일 학생의 글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풀어냈고, 김호빈 학생의 글은 교육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심사숙고 끝에 주제 밀착성에서 뛰어난 정원일 학생의 글을 ‘예컨대’로 뽑았다.
정원일 학생은 서론과 본론에서 학력·학벌 세습의 원인은 평준화가 아니라 대학 서열화임을 간명하게 밝혔다. 학력·학벌 세습을 막기 위해서는 교육개혁뿐 아니라 누진세율 강화, 사회보장 확대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학생들의 대안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다만 결론 부분이 대학 평준화 등 기존의 대안을 반복하는 데 그쳐 아쉬웠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날카로운 비유가 돋보인다. 글 곳곳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전쟁터에서 ‘실탄을 많이 가진’ 자가 승리하게 되는 이치” “ 현대판 골품제” 등 쉽고 날카로운 비유가 빛난다. 좋은 비유란 바닷가에 널려 있는 평범한 돌을 꼭 필요한 곳에 가져다놓아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원일 학생의 글은 그 좋은 ‘예컨대’가 될 만하다.
부평고 김호빈 학생의 글에는 학교제도, 배움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담겨 있다. 특히 서론과 본론에서 비평준화론자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비판한 부분은 압권이다. 예컨대 “과연 개천에서 용이 나왔던가? 사회적 특권층은 있지만 지도층은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KS마크는 출세의 지름길이지, 용이 되는 길은 아닌 것”과 같은 문장들이다. 다만 깊은 사고를 논리 구성력이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해 아쉽다. 예컨대 본론에서 조선시대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가 현실의 학벌·학력 세습구조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렇게 글의 구성이 혼란스럽다 보니 인상적인 결론도 내기도 어렵다.
‘영원한 예컨대 후보’인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의 글도 뛰어났다. 그의 글에서도 “현대판 골품제도” “진골 귀족” 등 날카로운 비유가 빛난다. 또 학벌사회 타파를 넘어 교사평가제의 도입, 7차 교육과정의 내실화 등 현안을 대안으로 끌어들인 점도 높이 살 만하다. 다만 ‘신자유주의’ 등 개념어가 남용되었고, 주장의 톤이 지나치게 높다는 아쉬움이 있다.
거창고 유소정 학생도 논리적인 글을 써주었다. 그러나 학업성취에 미치는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언급한 서론 부분은 적절치 않다. 학력·학벌 세습을 논할 때는 ‘유전적인 영향’보다는 ‘가정환경’의 영향을 중심으로 논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전외고 전혁 학생의 글도 훌륭했다. 그는 학력·학벌 세습의 근본 원인을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의 문제가 정작 글의 중반을 넘어서 나오기 시작한다. 가정환경이 다른 2명의 이야기 등을 생략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밖에도 글을 보내준 학생들의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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