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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길라잡이] ‘광장’과 ‘밀실’, 공존가능한가

등록 2004-02-26 00:00 수정 2020-05-03 04:23

명준의 경우

최인훈의 은 다들 읽었겠지? 여기서 광장과 밀실은 각각 사회적 영역과 개인적 공간을 상징해. 주인공 명준은 남한에서는 ‘광장 없는 밀실’을, 북한에서는 ‘밀실 없는 광장’을 겪고 절망해. 유일한 돌파구로 생각한 사랑에서마저 좌절한 뒤, 결국 그는 자살하고 말지. 이 얘기를 과거사로만 생각하지는 말자구. 지금 우리는 광장과 밀실을 제대로 회복하고 있느냐는 거지.

밀실은 없다

나는 밀실을 ‘나만의 시공간’이라고 봐. 그러면 이제 묻자구. 우리에게 과연 밀실은 있는가? 물론 개인이 쉬고 놀고 하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그러나 과연 그것이 나를 풍성하게 살찌우고 이웃과 교류하는 그런 건가? 오히려 그 시간과 공간마저 사회생활의 연장 아닌가 말이지. 우리 학생들의 삶만 하더라도 개인적인 영역은 아예 없다시피 해. 그 시간마저 미래를 위한 투자에 바치고, 그러다 지치면 잠으로 내일을 예비할 따름이지. 어른들이라고 별다를 건 없어. 모두가 ‘광장’을 대비하는 시간일 뿐, 진실로 자기만의 시간은 없다는 말이야. 밀실이란 게 뭔가? 남들이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영역 아닌가? 자신을 두텁게 살찌우는 그런 것 아닌가 말야. 근데 현대인의 밀실은 왜 이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냔 말이지.

그러나, 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그럼 우리가 광장이라고 생각하는 공적인 시공간은 어떤가? 한마디로 현대인의 사회적 삶은 어떤가 하는 거야. 학생들의 사회적 삶이야 워낙에 팍팍하다지만, 어른들이라고 해도 별수 없어. 거칠게 일반화하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돈벌이’에 매달리는 시공간이랄 수 있겠지. 그런데 이런 걸 광장, 즉 공적 영역이랄 수 있는가? 현대인의 사회적 삶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를 보면 충격적이야. 그 많은 사회적 삶들이 목표로 삼는 건, 불행히도, 자기 이익이야. 공적인 이익을 목표로 하는 삶은,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고는, 없다는 거지. 결국 형식적인 광장만 있을 뿐, 모두들 그 광장에서 밀실만 추구하고 있다는 거야.

시장, 유일한 시공간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밀실다운 밀실도, 광장다운 광장도 없는 삶을 떠돌고 있다는 결론이 나와. 왜 이렇게 됐을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해. 우리네 삶이 전부 다 ‘시장의 영역’에 포섭돼버렸기 때문이지. 방구석부터 내 발길 닿는 모든 곳까지 시장이 몽땅 장악해버렸다는 거지. 저마다 시장의 신, 물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장의 노예가 돼버렸다는 거야. 이 물신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유일신인 셈이지.

광장과 밀실의 공존을 꿈꾸며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여 꾸려나가는 공동체’의 상을 제시했어. 밀실과 광장의 공존을 꿈꾼 거지. 이건 어떻게 가능할까? 역사는 어떤 때는 밀실(개인주의)을, 어떤 때는 광장(공동체주의)을 추구하면서 비틀거려왔고, 현실은 둘 다를 잃어버렸어. 이런저런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났다고 우리마저 포기해야 하나? 어른들이 그랬다고 우리마저 그러려니, 우리가 어쩌겠어, 하며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해볼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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