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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 미국 비자 발급 굴욕기

등록 2008-06-05 00:00 수정 2020-05-03 04:25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font color="#C12D84">[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⑤] </font>

‘십지 지문까지 찍어가며 미국에 가야 하는 것인가?’
지난 4월 말 언론재단에서 주관하는 탐사보도 디플로마 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다. 이 과정의 마지막 순서가 미국의 ‘선진적’ 탐사보도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자 생활 8년차에 단 한 번도 미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촌놈’인 만큼 미국 구경을 한번 하고는 싶었지만, 지문을 찍어야 한다는 점이 께름칙했다. 9·11 테러 뒤 입국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검지 지문을 채취하기 시작한 미국은 하필 지난해 말부터 열손가락 지문을 모두 찍도록 제도를 강화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기분은 나쁘지만 별수 없지’라며 마음을 다잡고 지난 5월20일 오후 서울 세종로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20~30분가량을 줄 서서 기다린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던 대사관 안은 마치 도떼기시장 같았다. 하지만 비자가 안 나올까봐 걱정하는 탓인지 언성을 높이는 이는 없었다. ‘조용한 도떼기시장’이라는 어색한 공간에서 인터뷰는 크게 △구비서류 확인 △십지 지문 등록 △영사 인터뷰 등 3단계로 진행됐다.
역시 문제는 두 번째 과정인 ‘지문 찍기’에서 일어났다. 십지 지문을 찍는 창구는 1번에서 14번까지 있었는데 나에겐 14번 창구가 배정됐다. 내 앞에는 중년 부부가 차례로 지문을 찍고 있었다. 왼손과 오른쪽 검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모아서 한 번씩 찍고, 마지막으로 양손 엄지를 함께 찍었다. 창구마다 유리창 너머로 젊은 여직원들이 앉아 모니터를 통해 지문 위치 등을 확인하면서 마이크를 이용해 “아래로 조금 내려주세요” “손가락 땀을 닦고 다시 대주세요” 등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14번 창구의 여직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몇 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기를 두드리기만 했다. 중년 부부는 ‘감히’ 일이 늦어지는 이유를 물어보지도 못한 채 애처로운 표정으로 여직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역시 그 뒤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자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시간이 오래 걸리나 본데 옆 창구로 옮겨도 되나요? (왜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본인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여직원이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던진 말이 창구 귀퉁이에 달린 조그만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다른 일이 있어서 그러겠지’라고 생각하며 13번 창구 쪽으로 옮겨 줄을 섰다. 그런데 14번 창구 스피커에서 황당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저한테 얘기를 해야 하는데? 흥.”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투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뭐, 뭐라고…”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어디서 반말이야’ ‘미국은 대사관 직원도 오만방자한가’ 등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정식 항의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분란 일으키지 말고 참자’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13번 창구에서는 지문찍기 과정이 금세 끝났다. 힐끗 쳐다보니, 중년 부부의 지문 찍는 일을 끝낸 14번 창구의 여직원은 더 이상 ‘영업’을 안 한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2층 대기실에서 영사 인터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여직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40~50분가량 기다려 15초 정도 형식적인 인터뷰를 한 뒤 대사관을 나섰다. 쨍쨍한 햇살과 함께 ‘미국 같은 힘센 나라에 가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자괴감 같은 것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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